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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와 유언비어
5월 18일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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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괴담의 출발점이었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광주사태는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려왔다.  김대중이 본래 일으키려 했던 전국적 민중봉기를 4공화국 수사관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라 불렀으며, 1988년 11월 노태우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영향으로 정말로 그런 작전이 있었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국민이 많으나,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은 한 518픽션 소설가가 지어낸 허구이다.  만일 정말로 작전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김대중측에서 붙였던 "총궐기 대회"라는 작전명이었으며, 5월 21~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그 작전명대로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음모(혹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는 진행되고 있었다.

   1988년 11월 30일 심재철 당시 MBC 기자의 증언을 보여주는 위의 광주 청문회 동영상에서 심재철은 김대중의 전국연합과 자기의 관계를 극구 부인한다.  그는 1980년 5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소집되었던 "전국대학 총학생회장 모임에서 5월 22일을 총 궐기 일로 잡았을 때도 국민연합은 21일을 총궐기 대회로 정하고 있었다"는 궁색한 논리로 부인하였다.  그러나, 정말로 아무 관계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김대중의 국민연합의 거사 일정을 소상히 잘 알고 있었는가?  조갑제 기자의 광주사태 글들을 보면 심지어 조 기자도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총궐기 대회) 거사 계획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심재철은 알고 있었다.

   작금 5월 단체들이 지만원 박사님 등 수십 명을 고소고발한 이유는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광주사태"라는 명칭 사용을 금지시킨다면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원래의 김대중의 의도대로 "전국적 민중봉기"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그 작전명이었던 "총궐기 대회"라고 불러야 하는가?  만약 물태우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자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하여 그 명칭만을 사용할 것을 고집한다면 어째서 5월 단체들이 1995년에 물태우를 고소고발하였는가?   만약 물태우가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 사용 제창자였기에 고소고발하였던 것이라면 지금 "광주사태" 명칭 사용자들을 고소고발하는 논리는 도대체 무슨 논리라는 말인가?

   김대중 세력이 지정해 준 "광주사태"라는 명칭 사용을 5월 단체들이 금지시키려 하는 것은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위의 광주청문회 동영상에서 심재철이 김대중의 전국연합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은 당시 학생 운동권 조직 상위기구가 바로 국민연합이었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서울에서는 서울대가 지방에서는 전남대가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실제로는 서울대 운동권은 이해찬을 통해 국민연합의 지령을 받아 행동하였으며, 전남대 운동권은 윤상원을 통해 국민연합의 지령을 받아 행동하였었다.  서울대 운동권은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대자보를 제작하였을 때 그 대자보 명칭을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라고 불렀던 바, 바로 그 대자보에서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당시 동교동과 국민연합과 학생 운동권 등 김대중 세력이 본래의 목표였던 "전국적 민중봉기"가  그 작전명  "총궐기 대회" 대신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채택하였던 것은 부마사태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에서였다.  즉, 당시 그들의 논리는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이려면 부마사태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최근에도 김대중 세력은 제2의 광주사태 일으키자며 광우사태를 선동했었던 바, 광주사태 당시에도 김대중 일당은 제2의 부마사태를 일으켜야 한다면서 "전국적 민중봉기"를 선동했었다.  그 한 예가 1980년 5월 4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명의로 발표된 대자보였다:

<<10.26정변은 10월 부마사태 없이는 발생할 수 없는 민중변혁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중은 그 이후의 사태발전에 적극 참여하여 완전한 민주혁명을 완수할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

그 동안 진통을 겪어온 학원자율화의 문제가 일견 민중과는 유리된 보장된 자유에 겨운 배부른 작태로 보였을지 모르나, 그것은 사실상 우리의 힘을 집결하는 과정이었으며, 우리 내부의 유신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역사의 전선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싸움의 첫 단계 목표를 현재 국민적 합의 형성의 가장 큰 장애이며 민주화운동의 다양화와 활성화를 계속 저지하고 있는 탈법적 비상계엄의 해제에 두고 있으며, 이미 5월 2일의 민주화대총회에서 5월 14일 까지의 해제 시한을 통고한 바가 있습니다.

만일 이때까지 현 과도정부가 비상계엄을 해제하지 않으면 교내 혹은 가두에서 대대적인 평화적 시위를 전개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우리 민중이 이 싸움은 주도권을 차지할 때까지 한치의 타협도 없이 싸워 나갈 것이며, 이 첫 싸움에서부터 우리 서울대만이 아니라 전국 각 대학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싸움은 일부 극소수 반역사·반민주 유신잔당을 제외한 전민족의 총력전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계층, 모든 세력의 전폭적 지지와 참여를 촉구합니다. >> (
http://study21.org/518/doc/riot-plan.htm )

   이렇듯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 세력이 부마사태를 미화하려는 목적으로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제안하였음에도 5월 단체들이 광주사태라는 명칭 사용을 금지시키려 한다면 1988년 11월의 물태우는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할 근거로서의 역사 논리를 상실하게 된다.  만약 그 역사 논리가 상실된다면 남는 것은 엄청난 허위와 거짓뿐이다.  부마사태 이후의 사태 발전에 적극 참여하자는 김대중의 민중봉기 논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김대중은 1980년 5월 15일 그의 운동권이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인데 대해 사과한 일이 있는가?   20일에는 임신한 부인이 있는 정관철 중사를 시민군 트럭으로 깔아죽인데 이어 광주순경 4명을 시민군 버스로 깔아죽였으며, 21일에는 시민군 장갑차로 권용문 상병을 깔아죽였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1988~89년의 광주청문회이다. 제대로 상식이 있는 의원들이라면 시민군은 그렇게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인지 한번쯤 물어야 했다.  그리고, 5월 21일 발포가 있었는가?  아니다. 그날 오후 1시경 도청광장에서 죽은 시민군 수는 4명이었으며, 모두 시민군 총탄에 맞아 죽었다.  시민군이 총을 쏘며 장갑차를 몰며 공격해 오자 몇몇 장교들이 하늘을 향해 공포탄을 쏜 것은 발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총에 맞은 시민군은 앞이 아니라, 뒷편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탈북자들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 특수부대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런 시도가 있었다고 증언하며, 사고현장에 있었던 시민군들은 시민군 편의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여러명 쓰러졌음을 증언한다 (
http://study21.org/518/doc/518movie05.htm )  여하튼, 그날 시민군 4명을 쓰러뜨린 총탄은 시민군쪽에서 날아온 총탄이었으며, 시민군 총기의 실탄이었다.  그럼에도, 광주청문회에서는 발포 책임자를 찾아낸다며 군인들에게 누명을 씌웠으니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무엇이 그 엄청난 거짓의 출발점이었던가?  바로 김대중의 전국연합이 퍼뜨렸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였다.  흔히, 과격시위가 먼저였나 과잉진압이 먼저였나를 따지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뭔가 전제가 잘못된 논의이다.  김대중의 전국연합 조직 중 무기 탈취 계획을 미리 세워둔 조직이 있었으며, 그 무장단체는 5월 19일부터 나주와 영암 등 광주 외곽을 돌며 무기를 탈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주외곽의 무기탈취조는 광주시내에서 과잉진압이 있었기에 탈취한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이후에 시위는 없었다. 단지 파출서를 파괴하고 순경들을 납치하여 옷을 벗기고 때리는 폭행이, 그리고 방송국과 세무소들에 대한 방화가, 그리고 광주역과 도청 등을 점령하려는 시민군의 공격이 있었을 뿐이다.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전 전남대 운동권이 모두 광주를 떠나고 없는데 어떻게 학생시위가 있을 수 있는가?   광주사태 당시 학생시위는 없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오마이에 실린 노무현의 최측근 신계륜 의원의 경험담이다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3409 )   학생시위는커녕 전남대 학생회 간부들이 모두 광주를 멀리 떠나 있었다.  김대중의 전국연합이 시키는 대로 5월 21~22일을 거사일로 잡기는 했으나, 16일 대학생 일부가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넘기자 겁에 질린 학생 운동권 조직은  그날로 와해되었다.  신계륜은 광주의 박관현에게 몸 숨길 것을 의탁하려 찾아갔더니 박관현 역시 이미 어디론가 잠적해 있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다수 광주시민들은 광주사태 당시 전남대 학생회 간부들은 광주에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5월 18일 아침 일찍 학생 운동권이 모두 멀리 떠난 광주에서 학생 시위가 있었을리 만무하며, 그날 갑자기 광주시민들이 민주화운동을 하기로 결정했었을리도 만무하다.  단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시민들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그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민들이 파출서를 파괴하고 순경들을 납치하자 광주경찰서가 광주향토사단에 순경 구조를 요청하였으며, 광주향토사단은 예하 7공수 33, 35대대를 급히 동원하여 치안 유지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김대중 세력이(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열사로 만든 이 어처구이 없는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당시 전남대생이었던 이승룡은 김대중의 내란음모(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계획이 발각된 직후  "저녁 7시경에 전화가 왔다. 연락을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로 '지금 서울에서는 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었으니 빨리 피하라'는 내용이었다"고 증언한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35 ).  그리고, 바로 이 사건이  MBC 드라마 "5공화국"에서 윤상원이 박관현더러 시골에 가있으라고 말하는 장면의 배경이었다.

   박관현을 잘 아는 광주의 한 기자 역시 광주사태의 기폭제였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의 원인을 추적하였던바 "박관현 연행 설… 누가 퍼뜨린 것인가"라는 소제목 하의 문단에서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기술한다:

<< 박관현 연행 설… 누가 퍼뜨린 것인가

      5.18첫날인 18일 오전 9시 20분께 전남대 정문앞 거리. 학생들은 캠퍼스에 진주한 계엄군 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어떤 학생이 흥분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남대 근처에 사는데, 오늘 새벽 산책을 하다 박관현이가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그래요? 총 학생회장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학생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어떤 학생'의 이 목격담은 사실과 다르다. 연행된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검거망을 피해 그날 저녁 여수 돌산 도에 도착,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풍문이 '어떤 학생'에 의해 발설되었을까. 이전 5.18을 '사전 음모 설' 쪽으로 몰고 가려는 시각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시키기 위해 '음모 집단'쪽이 만들어 내 퍼뜨린 고도의 전술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취재에 임했을 때 그 '어떤 학생' 의 이름자를 물어 보지 않은 것이 지금도 후회 스럽다. 그것은 '중대한 단서'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악몽의 10일'이 태풍으로 지나간 뒤 광주 사람들은 박관현의 행방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필시 죽었을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등등 추측도 가지각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망명 설'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육하원칙을 갖추고 떠돌았다.

      박관현은 5.18직후 돌산 섬을 떠나 대처인 서울로 갔다. 서울 피신 생활은 눈물나는 것이었다. 막노동. 리어카 장사로 연명했으며, 삼양동 산동네 시절의 그의 거처는 다락방이었다. 훗날 그는 요꼬 공장 생활도 했다.

      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수배 중인 시국 사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이 펼쳐졌다. 이 때 요꼬 공장 노동자들이 경찰에 신고, 그는 붙잡히는 몸이 되었다. 피신 시절 그의 가명은 '박건욱'이었다. >>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0.html )

     위의 기자가 증언하는 대로 5월 18일 오전 10시경 박관현 체포설 괴담이 처음 시작되었으며,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등장한 시간은 정확하게 오후 1시 반이었다.  1시경 윤상원이 애써 300명의 시위대를 금남로에 모았으나 전남대 학생회 간부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집결 목적을 모르는 시위대가 뿔뿔이 흩어지려 할즈음 누군가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광주 경찰이 죽였다"고 외쳤다.  그 소리에 시위대 수는 금방 3천명으로 불어났으며, 불과 두시간 만에 시위대의 돌과 화염병에 광주경찰은 괴멸되었다.  윤상원의 동지이자 신계륜의 후배인 임낙평은  그의 글 "광주 항쟁 기념 윤상원 열사의 삶과 투쟁"에서 한편으로는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퍼뜨리면서 한편으로는 박관현에게 전화걸던 윤상원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태풍의 눈이 되어 있는 박관현의 은신처에 전화를 걸었다. 총무 부장 양강섭이 전화를 받았다.

"예비 검속(연행)을 피한 학생회 집행부의 조직을 투쟁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고, 시가지 투쟁 에 나서야 한다. 또한 화염병을 만들어 시가지 투쟁 현장에 배급해야 한다. "

양강섭은 윤상원이 화염병의 제조 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하더라고 기억하고 있다. 양강섭은 윤상원의 제안에 대답만 할 따름이었다. 이미 학생 투쟁 조직은 와해되었고 박관현도 광주를 빠져나갈 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18일 오후 늦게 박관현과 몇 사람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4.html )

   작금의 광우사태에도 배후가 있다.  좌익이 촛불소녀라고 미화하는 여중생 배후에도 좌익이라는 배후가 있으며, 그 좌익 배후에는 북한이 있다.  광주사태 당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하였던 것이라기보다 김대중의 국민연합이란 단체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위에서 임낙평이 증언하듯이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일방적으로 "학생회 집행부의 조직을 투쟁 조직으로 확대 개편하고, 시가지 투쟁 에 나서야 한다. 또한 화염병을 만들어 시가지 투쟁 현장에 배급해야 한다"고 전남대 학생들에게 지시하였다.  광주사태 배후에 김대중 세력이 있었으며, 광주사태 기폭제는 윤상원 등 광주의 김대중 그룹이 널리 빠르게 퍼뜨린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였다.

  

☞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관련자 이신범씨 증언

☞  제5공화국의 미국식 간선제 선거가 체육관 선거였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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