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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 유언비어인가 사실인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가 시작되고 곧 서울대 운동권이 "광주사태 속보"라는 이름의 대자보를 전국 대학교 벽보에 붙였던바, 여기 5월 18일 공수부대가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사격하여 광주시민 2만명이 사살되었다는 급보가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그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화려한 휴가"는 그 "광주사태 속보"는 허위였음을 입증한다.  영화에서 비행기로 동원된 공수부대는 11공수였으며, 19일에야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시민군과의 충돌 장소는 도청광장이었으며, 그 날자 역시 18일이 아니라, 21일이었다.  따라서, 5월 18일 광주시민 2만명이 사살되었다는 속보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5월 21일 시민 수천명이 도청광장에서 사살되는 장면이 나오는 바,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유언비어인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는가이다.  실제로는 그날까지 시민군 사망자 총 숫자는 4명이었으며 모두 시민군 흉기 조작 오류 혹은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자들이었다.

   그러면, 실제로는 어느 편이 가해자였으며, 누가 어떻게 죽임을 당하였는지 구체적으로 그리고 정밀하게 시간별, 분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한 평가는 그 내용이 유언비어인가 아닌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실제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는 초등학교 졸업자였음에도 영화에서 박남선역의 안성기는 4년제 육사출신으로 학력 위조하여 등장한다.  그런데, 1980년에 특전사 예비역 대령이려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보다 선배 기수여야 하고, 전두환 장군이 4년제 육사 1기(통칭 11기)로 가장 선임 군번이었기에 그 이상의 선배는 없다. 따라서 역사에서 실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박흥수 예비역 대령은 역사왜곡이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이다.

   그러면,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 5월 21일 대학살은 유언비어인가 사실인가?  광주사태 때 첫 사망자는 공수부대원이었다.  5월 19일 광주천변으로 떨어진 공수부대원을 시위대가 돌로 찍어 머리를 으깨어 죽였다.  시민군 김현채(당시 19세의 식당종업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곳(양동)에서 시민들이 공수를 돌로 찍어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으나 공수를 이미 병원으로 옮긴 뒤였다.  시민군 최종북 (당시 15세로 무진중학교 3학년)도 5월 19일 광주공원 앞에서 발생한 그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학생과 시민 2백여 명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

얼마 후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공수부대원 한 명이 따로 떨어진 채 광주천변으로 붸겨갔다. 그러다 광주천변으로 떨어져 버렸다. 시민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또한 군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  이어 시위대는 버스로 순경 4명을 압사시켰다(사건 장면 동영상:
http://study21.org/518/video/515.htm ).

  그 다음날 20일에도 군경 편에서만 사망자가 있었다.  군인들에게 밥을 실어다 주는 배식차를 시위대가 쓰러뜨리자 달려온 공수부대원을 시위대가 차량으로 깔아죽였다.  3공수는 20일에야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부하들이 아침과 점심을 건빵으로 때우고 저녁식사마저 못했기에 밤 늦게나마 급식 수령에 나선 배식차를 시위대가 쓰러뜨리자 달려온 정관철 중사를 잔인하게 차량으로 깔아 살인하였던 것이다.  그는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동료 하사관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5월 21일 오후 1시 반경 시민군 장갑차 한 대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을 깔아죽였다. 부상병이 생겼다는 무전을 받은 지 20여 분이 지난 후 부상자들이 후송되어왔다. 한 사람은 차량에 깔려 다리를 다친 6지역대 張하사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차량 한 대가 돌진해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상당했다고 했다. 張하사의 말에 따르면 차량은 지그재그로 진압군을 향하여 마구 돌진해 왔고 그에 따른 부상자가 속출하자 부대원 모두가 겁을 먹고 피하기에 급급했으며 진압 또한 매우 과격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張하사와 함께 실려온 두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그들은 경상도 번호판을 단 화물트럭의 운전기사와 조수였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다가 경상도 차량이란 이유로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구타를 당했는지 옷도 찢겨지고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5월 21일 오후 한시경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시민군 이수범의 증언에 따르면, 공수부대원 한 명이 즉사하고 두 명이 부상입었다.  이수범은 그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는 도중 시민 쪽에서 가지고 있던 APC 장갑차 한 대가 군인들 쪽으로 달려 갔다. 그때 공수부대원들은 2열 횡대로 해서 YMCA 앞 횡단보도를 중심으로 우리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갑차를 몰고 가니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들이 몇 명 치어버렸다. 그때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을 당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공수부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오후 1시 30분이었다. 내가 왜 그 시간을 기억을 하냐면 우리가 계속 시간 카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보면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
http://cafe220.daum.net/_c21_/bbs_read?grpid=14LzD&mgrpid=&fldid=8yGb&page=1&prev_page

그 상황을 당시 11공수 61대대 안부웅 중령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13시 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길래 자기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시위대도 더 이상 분수대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는 잠시 쉬고 있었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 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
http://cafe.empas.com/518/bbs/b3/read.html?asn=42¬ice=0&pno=1&oby=2&odir=0&fd=0&bt=16&ac=50&rurl=list.html )

   시민군은 의도적으로 군경을 차량으로 깔아죽였을 뿐 아니라, 사고를 내어 많은 시민을 죽였다.  5월 21일 오후 11시쯤 송정읍 영광동에서 시위 군중들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불을 질러 밀고 가던 대한통운 트럭이 노인 1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5월 22일 오전 광산군 동곡면 하산리 동곡교에서 시위군중이 몰고 가던 군용 진압차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용수로에 전복 추락, 신원 미상의 청년 1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더욱이,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 최초 발포자는 시민군이었음을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은 5월 21일 시민군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죽어간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

  시민군 김여수(당시 20세, 용접공)는 광주사태 당시 발포는 시민군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단다.  

<언젠가 학운동에 있는 배고픈다리에서 계엄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등성이에서 군인들이 3, 4명씩 넘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 쪽에서 먼저 발사를 했다. 우리는 다리 부근의 주택에서 주로 총을 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총을 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총을 쏘는지 모르기도 했고 또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시민군 조인호(당시 나이 20세, 다방 주방장)도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의 총성은 분명 시민군 화기에 의한 총성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군용 트럭 3대에 30-40명의 시민군들이 트럭 양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이 몰려들자 차를 멈추었다. 지원동 탄약고에서 무기를 가져왔다고 하면서 모여든 시민들에게 총을 나눠주었다. 수류탄은 트럭에 탄 시민군들이 2개 이상씩 소지해 버린 후여서 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카빈총은 내가 본 것만 해도 40여 정이 넘었다. 시민군이 지닌 것과 모두 합치면 꽤 될 것 같았다. 총이 분배될 때 고교생들도 받아가자 다시 회수하여 고등학생들은 갖지 말라고 했다. 그때 시민군 말로는 권총이 몇 정 있었는데 어디로 가버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가 먼저 지녔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리고 LMG 2정이 함께 있었는데, 27살 정도이고 키가 작은 청년이 월남전 혹은 군대에서 자신이 LMG 사수였다면서 도청 쪽으로 총을 3발 쏘았다. 총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시민군 이재춘(당시 나이 21세)은 5월 21일 도청 광장에서 총성이 울린 이후 시민군 편에서는 사망자는커녕 부상자 한 명 없었고, 군인들만 죽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22일 아침 도로로 가보니 어젯밤에 총격으로 인해 시민군들은 부상 하나 없었는데, 군용 트럭 안에는 군인 일등병이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죽은 군인은 공수가 아니라 일반군인으로 운전병이었다.> (출처)

  그 총소리에 이전까지 도청에서 계속 들렸던 총소리가 뚝 그치고 시내는 고요해졌다. 그런데 그때 무등산 쪽에서 군용 헬기 3대가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우리들 상공을 선회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저 녀석도 한패니 쏘아 버린다"면서 헬기 한 대를 향해서 총을 쏘았다. 그러자 총에 맞은 헬기는 비틀거리면서 송정리 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2대의 헬기는 아주 고공으로 비행하였다.> (출처)

   이렇듯,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현장을 목격하였던 시민군은 이구 동성으로 그날의 총성은 시민군이 발사한 화기에서 난 총성이었음을 증언한다.  심지어 영화의 가짜가 아닌 진짜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조차 5월 21일 사태 때 발포는 시민군 편에서 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몇 사람이 뛰어들어오면서 지금 도청의 공수부대들이 퇴각하고 있으니 빨리 도청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혹시 계엄군이 도청을 빠져나가는 듯하다가 광주천을 따라 들어와 시민들의 등 뒤에서 공격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 주저하였다. 그래서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만일 공수대원들이 진짜 퇴각을 한다면 물러가버린 뒤에 도청으로 가봐야 할 일도 없을 테고 무장시민들이 다른 곳에도 있으니 만일을 위해서 광주천에 매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들은 광주천 봉쇄를 위한 무장시민의 배치에 동의해주었다. 나는 리더급 무장시민에게 양림다리에서 현대극장밑 다리까지 무장시민을 매복시킨 다음 기관총을 배치하도록 하고, 만일 진입해 들어오는 공수대들을 발견하더라도 신호없이 개별사격은 절대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공수대와 무장시민의 구분을 위하여 「담배연기」라는 암구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무장시민의 배치를 부탁하고 밖으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불로동 다리(불로교)위에서 AR소총을 거치하고 M1소총과 AR소총에 탄알을 장진, 시험사격을 하고 나서 매복에 들어갔다.>

   그러면, 광주 21일 사태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며 병력을 인솔하였던 현장 계엄군 지휘관들은 어떻게 그 사실을 증언하는가?  진실은 영화 제작자의 픽션 소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증인 증언에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가 진압되었을때까지도 "전두환"이란 세 글자를 보지도 못했다고 하며, 도청광장 충돌 당시 현장 지휘관이었던 한동석 중위(31사 96연대 1대대 소대장, 전남 담양)는 이렇게 증언한다:

  <전두환이 학살 명령을 내렸다>라고 가정을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실탄을 휴대하고 즉, 실탄 분배 명령이 있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서 발포명령이 나는게 상식이지요.   저는 경계용 실탄을 가지고 출동할때 부대 상황실에서 탄통에 봉인된 실탄을 가지고 나와서, 솔직히 수없이 사용충동을 많이 느꼈지만... 분배명령이나, 사격명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다행히 그 전에 헬기로 탈출 할 수 있었기에, 특전사 지역대장(대위)에게 전달하고 헬기에 올랐던 것입니다.   명령을 받고 전달한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퇴각할 때 엄호용으로 활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달했지요. 특전사 병력들이 맨 몸으로 버티기에는 한계가 왔다고 저는 생각했기에 아무 부담감도 없이 전달 했던것입니다. >

  저가 5월 21일 오후 2시경 헬기를 타고 도청 광장을 이륙해서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개미떼 같이 작게보이는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해 있는 광주   중심지를     하늘로 날아서 탈출할 수 있다는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을   지금 연출 하고 있다는사실에 감사 했으며, 하루 밤(5/20)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특전사 병력에 대하여 어찌니 미안한지... 눈물을 쏟고 말았다. (마음 속으로 혼자 도망가는 배신자 같은   죄스러움)병력이 많으니 헬기 수송작전은 불가 할 것이고 퇴로를 개척해서 무등산 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을 것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위안을 삼은 것은 저가 전달해준 <3 탄통의 실탄>이 있으니 퇴각하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세월이 흐른뒤,   추측하건데   시위대가 주장하는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 에   저가 전달한 실탄이 사용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되네요.   송구스럽기 그지 없네요. 이미 총소리가 난 상황에서 31사단 병력(40 여명)은 헬기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 특전사 병력도 막바로 철수작전에 돌입하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막바로 철수 했다면 희생자는 그리 많이 발생하지않았으리라는 예상도 해봅니다.<철수 작전이 지연 되지는 않았는지...>

  급히 쓰다보니 오자도 많고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었네요. 저가 주장한 5월 21일 최초 총소리는 금남로 방향의 특전사 인간 바리케이트가   "탕 !~ "하는 사제총(?) (M-16소총 소리는 아님)가 나면서 뒤로 밀리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엄밀히 표현한다면 <민족적 비극의 피해자>는 광주 시민들 만은 아닙니다.   말 못하고 표현 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계엄군들의 육체적, 정신적 피해는   그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습니다.  저도 1-2년 까지는 심각할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 날 수도 없었고, 서울에서의 첫 직장생활은 잘 적응을 할 수가 없었읍니다.,다행히 고향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직장생활에 몰두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안정을 취해가고 있으며, 지금도 가끔씩 꿈을 꿀때면 아직도   軍 部隊 를 배경으로한 것과 전역을 하지 못한 상태로 꿈 속을 헤맬 때가 있읍니다. 저가 이정도라면, 특전사 병력들의 실상은 표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매우 심각한 상태일 것이라고 저는 감히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군요. 그 분들의 심정도 어느정도 헤아려 줄 수있는 마음의 배려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꼭 당부 드리고 싶네요. 이글을 읽는 분들 만이라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들(특전사 병력)도 억울한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도 100% 비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너무 일방적으로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것은 자제 해 주십사 당부 드립니다. 대다수의 <<군인은 사기를 먹고 살며,  명예를 존중히 여기며 국방을 사수하는 순수한 국민의 아들들입니다.>>

   군인이 실탄을 사용할 수 있는 요건에는 평소에는 사격 훈련목적으로 사용하는 교탄(교육용 실탄)을 사용할 때에도 사격통제관의 통제에 따라서 사용을 할 수 있읍니다. 경계용 실탄 역시 봉인된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가 엄중한 통제권자의 통제에 따라서 사용하게 되어 있읍니다. 사격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반드시 <실탄 분배 지시>가 이루어 진 후에야 발포가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저희 부대도 MBC방송국에 출동할 때에, 비록 경계용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탄 분배 지시>도 <사격 명령>도 상부로 부터 지시를 받지 못했읍니다.   MBC방송국에서 탈출할 때에도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였지만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소대장의 <단독판단>으로 저와 병사들의 생명을 위해 <도피 및 탈출>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비록 정식 철수 명령은 받지 않았지만 추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자위합니다.(지금도 나의 휘하에 있었던 병사들은 정상적인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 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상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명령>을 받은 것은 5월 21일 오후 늦게 담양부대에 복귀해서 지시를 받은 것으로 기억이됩니다.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장교라도 실탄을 개인적으로 보유할 수가 없었읍니다. (경계용 실탄도 20발 들이 탄창에 15발씩 장전하여 청테이프로 봉인한 후에 다시 탄창을 탄통에 넣고 봉인을 하고 있었읍니다.)

   7공수는 실탄이 없었기에   철수하는 저희 병력에게 <실탄 인수인계>를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도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다른 부대에게 실탄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테니깐요.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대형 트럭의 질주<공격>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도청 정문 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읍니다.  [한동석 중위 증언 출처 및 원문 전문은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토론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재 댓글 수가 362개이므로 반드시 1번 댓글부터 보셔야 함.]  

   탈북자들은 광주사태 당시 침투한 북한군이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시민군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군인이 쏜 것처럼 유언비어 퍼뜨려 폭동을 선동했다고 증언하는바, 그런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언들이 시민군 증언록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시민군 김용균(당시 21세 용접공)는 5월 22일 목격한 그 사실을 광주사태 9년후 이렇게 서술한다:

  <건물(서방 철길 바로 옆 2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심장이 멋는 듯했다. '아!'하는 짧은 외마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뻣뻣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나를 붙잡던 학생이 입구에 나뒹굴어 쓰러져 있었다. 계단에는 피가 낭자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총소리가 입구에 있는 학생을 명중한 것이었다. 계엄군들은 동신고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 학생이 총을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면 건물 맞은 편 광주상고나 광주교육대학교 부근에도 계엄군들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직까지도 나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러면, 광주 5.21 사태의 진실은 무엇이었는가?  참으로 학살이 있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군경 사망자 수가 3배 더 많았으며, 시민군 사망자 4~6명 중 전원 혹은 대부분이 시민군 총기조작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이었다.  증언으로 확인된 이 사실은 당시 광주 의사들이 남긴 소견과도 일치하다.  시민군 사인은 시민군 총기 실탄이었다.  이렇듯, 광주사태 당시 서울대 운동권이 제작하여 "광주사태 속보"라는 이름으로 전국 대학가에 뿌렸던 대자보도 사실 확인이 없었던 유언비어였으며, 영화 "화려한 휴가"는 전혀 사실 확인이 없는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이다.  더구나, 무장시민군이 6차례 교도소 습격하여 발생한 54명의 사망 사건과 수십 명의 군경 사망 사건들에 대해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고 악의의 유언비어만 보여준 영화이다.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美 뉴스 보도영상
  
518시민군 무기
518광주시민군 총기

518무장시민군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 무장시민군이 사용하던 총기

광주시민군 폭탄
난동자들은 5월 21일 전남도청을 점령한 후 제일 먼저 폭탄을 제조하였다.


열띤 토론마당


학력 위조 안하고 경력 사칭 안한 진짜 시민군 대장 증언    

광주사태의 진실: 영화 "화려한 휴가" 실제인물 사진전    

과거사위의 깡통 무식 드러낸 "전두환 자위권 발동 주장설"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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