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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웅 사단장은 김대중처럼 얼굴마담이었는가?



김대중이 한민통 두목시절 데리고 있던 문세광이 1974년 광복절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였다가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사건에 대하여 김대중의 책임회피 논리는 자기는 감투만 쓰고 공작금만 받는 얼굴마담이었을 뿐이니깐 문세광이 북한으로부터 지령받고 저지른 사건에 대하여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이 한민통 활동경력을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내세울 때는 자신은 꼭둑각시에 불과했다는 논리가 아니지 아니한가! 김대중은 1997년에는 기아자동차 노조더러 대통령 되면 보은할테니 장기 파업해 달라고 청하여 IMF환난을 초래해 놓고서 당시 대통령은 김영삼이라며 김영삼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그러나, 국고를 도적질하여 8억 달러를 김정일의 핵무기 개발자금으로 송금한 사건에 대하여는 실무자가 따로 있었다며 박지원씨만 감옥에 가게 하였다.

그런데, 김대중은 광주폭동 진압의 실제 명령자였던 정웅 당시 31사(광주향토사단) 사단장에 대해서도 얼굴마담 논리를 내세웠다. 김대중은 정웅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은 얼굴마담이었을 뿐이었기에 진압 책임은 전두환 장군에게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도대체 정웅이 언제부터 얼굴마담이었는가? 정웅은 12.12사태 직후였던 1월 1일부로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니, 5.18측 논리대로라면 신군부였다. 그런데, 광주사태의 미스테리 중 하나가 폭동진압명령의 실제 장본인이었던 정웅이 불과 8년만인 1988년에 광주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평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면 김대중에게 7억원의 공천헌금을 바쳐야 했던 그 시절에 김대중이 정웅을 광주 국회의원으로 밀어주었으니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던 것일까?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연결고리의 산증인 중의 하나가 바로 윤기권이다. 5월 18일 윤기권 등 일단의 폭도들이 광주경찰 45명을 인질로 납치하자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홍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한 것이 광주사태의 발단이었다. 경찰 45명을 인질로 납치하였던 폭도들 중 유일하게 1989년에 본인 스스로 그 실명을 밝혔던 윤기권이 1991년 3월 2억원의 보상금을 챙기자마자 또 다른 일을 위해 월북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의 월북이 가능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으로 납치된 것이 아니라, 자진 월북한 이가 바로 대표적 광주시민군 윤기권이었던 것이다 (http://study21.org/518/doc/518movie06.htm

그러면 1980년 5월 18일 광주순경 45명을 구출하는 작전이 시급하였던 때에 과연 정웅이 얼굴마담 노릇만 하였다는 말인가? 1949년 장교로 임관한 정웅은 전두환 장군보다 장교 군번이 무려 7년이나 빠르다. 별들의 세계에서는 상하가 군번순으로 결정되므로 정웅 장군이 전두환 장군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별들의 세계에서도 어른 격이었던 정웅이 1987년 김대중 수행원 노릇을 하였다. 본래 정웅과 김대중은 동창 관계 비슷한 인연이었다. 김대중은 목포 상고를 다녔을 무렵 정웅은 순천에서 5년제 중학교를 다녔는데, 본래 목포와 순천은 같은 행정구역이었다.

광주사태 당시에는 5.18사기꾼들은 전두환 장군이 직접 폭동진압을 하였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전두환 장군은 절대로 원거리 작전명령을 내리는 일이 없었다. 그가 작전지휘를 할 때는 항상 사병들 선봉에 섰었다. 심지어 아침마다 있는 구보훈련에서도 그 분은 항상 사병들 선봉에서 뛰셨던 분이었다. 전두환 장군이 광주사태 때 광주에 온 적이 있었는가? 그리고, 광주향토사단의 작전은 광주향토사단의 고유 권한이요 타부대 지휘관이 관여할 수 없었다. 위의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 동영상에서 정웅의 직속부하였던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조차 이때까지 작전 지휘권과 시위에 대한 총책임은 31사단에 있었다고 증언했음을 우리는 보며 듣는다.

그러면 어째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온갖 누명을 씌우던 김대중이 실제 진압책임자 정웅 장군에 대해서는 자신의 한민통 두목시절처럼 얼굴마담이었다는 논리를 내세웠던 것일까? 광주사태후 미국에 간 김대중은 1천회 이상 광주사태 관련 강연, 세미나를 하면서 광주시민 오천명이 죽었다고 사기쳐서 엄청난 금품을 모았다. 그러나 단 한푼도 광주사태 희생자에게 전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용돈으로 쓰라고 기증한 돈일 줄 알았다고 답변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김대중의 미국 체류기간 동안 생활비를 아주 넉넉하게 보내 주었는데도 그토록 비열하였던 김대중이 귀국하였을 때 김대중의 수행원이 된 과정을 정웅 장군은 이렇게 서술한다:

『김대중 선생이 미국에 있을 때 1천회 이상의 강연, 세미나를 했는데, 그때 나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난 71년 대통령 선거 때 그분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 8월7일 근로 복지 공사를 그만둔 뒤 김대중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반갑게 맞으며 11대 선거에서 중도 사퇴한 얘기 등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모든 오해가 풀렸다. 면서 민추협 부의장 자리를 권하셨습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001.html

그러나 정웅 장군이 정말로 31사 얼굴마담이었는가? 그리고 얼굴마담에 불과했었기에 평민당 창당후 김대중에게 가장 중요한 광주 국회의원 자리를 정웅에게 선사하였는가? 정웅은 5월 19일 무혈 저지 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참모들을 불러서 사전에 작전 명령을 한 뒤에 밤 11시에 33, 35 공수대대장, 11공수여단장, 경찰국장, 31사단 이하의 참모 연대장 대대장을 모두 집합시켜놓고 지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에 대하여 그의 직속 부하였던 임정복 증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5. 19일에 하달한 명령은 제가 직접 쓴 겁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작성한 명령은 정상적인 충정작전 명령이지 유혈 진압작전 명령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만약에 사단장님께서 저한테 유혈 진압작전 명령을 작성하라 하는 지시를 제가 받았다면 이 사항은 상당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작전 명령을 작성하는 구성요소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지휘관의 작전 개념상의 문제를 집어넣어야 되고....>

5.18측 주장을 최대로 수용하며 5.18측을 지원하기 위하여 기사를 쓰는 김영택 기자조차도 정웅의 얼굴마담론은 수용하기를 거부한다. 그런 거짓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토론한다:

<어떤 형태였든 간에 5월 18일부터 21일 오후 4시까지의 공수부대 제7여단, 33, 35대대에 대한 지휘권은 제31사단장에게 있었다. 그는 제7여단뿐 아니라 19일 새벽에 도착한 제11여단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행사, 금남로에서 제7여단 병력과 교체하도록 잔전명령을 내렸었다....

33, 35대대장들이 31사단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 부대를 직접 지휘한 정사단장은 광주민중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과잉진압’에 대한 지휘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특히 과잉진압 사실을 알게 된 그가 무혈진압명령을 내렸다면, 명령을 받은 지휘관들의 보고 이전에 현장에 나가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그는 확인과정을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돌아보니 ‘평온했었다’고까지 말했다.> ((출처 : 실록5.18 광주민중항쟁 / 김영택 / 창작시대사 / 1996 )

정웅 장군이 무기 및 실탄을 폭도들에게 탈취당한 책임을 주영복 국방장관이 물어 5월 22일부로 직위정지된 후 광주향토사단의 지휘권이 소준열 장군에게로 넘어갔다. 아래 두 개의 광주청문회 동영상은 5월 22일부로 정웅 장군으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으셨던 소준열 장군이 5월 22일부터 27일까지에도 전혀 지휘체계 이원화는 없었으며, 자신은 얼굴마담이 아니었음을 증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로써 지휘체계 이원화라는 것은 없었음이 다시 한번 명확하게 입증된다.






그간 5.18사기꾼들이 어찌나 거짓말을 해왔던지 광주사태 당시에 5.18무장단체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당시 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당시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에 참여한 조직 중에 학생 조직도 있었는데, 서울대 운동권과 전남대 운동권이 그 학생조직 선봉에 있었다. 그리고, 제2의 부마사태를 일으키자는 의미로 서울대 운동권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제작하여 5월 22일 전국 대학교 벽보에 붙이자 기자들미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이 광주사태라는 용어의 유래였다. 아래의 삐라는 그때 서울대 운동권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 제작을 위해 사용하였던 5,18유언비어 삐라이다.


이 5.18삐라를 다운받아 큰 파일로 선명하게 보시려면 여기를 마우스 오른쪽으로 누르세요.

만약 이런 유언비어 삐라 제작이 참으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어째서 그 작성자가 누구였는지 밝히지 못하는가? 21일 제작되어 하루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지만 작성자 성명이 없다면 그 허위사실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는가? 만약 침략의 수단으로 북한이 오늘날 불순세력을 이용해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 또 속을 것인가? 그런 유언비어 삐라를 베껴 전국에 확대 유포하였던 당시 서울대 운동권이 바보가 아니라 지성인이었다면 어째서 떳떳하지 못한가? 당시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 작성자가 누구였는지 떳떳하게 공개하여야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에 신뢰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위 삐라가 작성되었던 5월 21일까지에는 죽은 사람들은 군인들과 순경들뿐이었다. 군인들을 시민군 장갑차 등 각종 차량으로 깔아죽였으며, 5월 20일 저녁에는 순경 4명을 버스로 깔아죽였다. 그리고 5월 21일 새벽 폭동선동용으로 5.18불순세력이 살해한 두 명이 있었다. 그날 낮 사망한 4명도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이었다. 위의 삐라가 5월 21일 저녁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하다가 사망자가 발생하기 전에 작성된 것이라면 이처럼 무장시민군의 범행과 과오로 인한 사망자만 있었을 때 저런 유언비어 삐라가 작성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삐라는 작전 지휘권과 시위에 대한 총책임이 31사 정웅 사단장에게 있었던 때 발생한 일이다. 그리고 정웅 사단장은 단지 얼굴마담이었다는 김대중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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