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연구사료

전두환 전 대통령 각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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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질의에 대한 소견 및 논평

    본문건은 1995년 5월1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 1부 장윤석 부장검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낸 서면질의에 대한 소견과 논평을 기재한 것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에 일어난 정치적 제반사건과 광주사태의 진상규명이 국민의 중요한 관심사이며 올바른 역사정립을 위하여서도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헌정발전에 역행이 되지 않는 한 가능한 협조를 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본문건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와 같은 지시에 따라 1980년 당시의 상황을 주관적 평가를 배제하고 사실 위주로 기재하였습니다.

    본문건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첫째, 서울지방검찰청이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보낸 서면질의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알고 있는 사항 뿐만 아니라 최규하 당시 대통령과 내각 그리고 계엄당국의 소관사항에 대한 질문과 1980년 시국 상황에 대한 소견을 묻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알고 있는 사항 이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올바른 진상규명에 오히려 역행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1980년에 일어난 정치적 제반사건과 광주사태와 관련한 상황평가와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한 논평은 본 문건에 첨부되어 있는 '1980년에 일어 난 정치적 제반사항에 대한 논평'과 '광주사태에 대한 논평'을 참조하는 것으로 가름하였습니다.

    '1980년에 일어난 정치적 제반사항에 대한 논평'과 「광주사태에 대한 논평」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알고 있는 사실 뿐아니라 당시의 사정을 알고 있는 관련인사의 진술과 관계문서에 들어 있는 정보를 망라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계엄군의 병력출동과 주소요사태 진압작전의 작전지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소관사항도 아니고 관여한 사실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에 관련된 사실규명은 계엄사령부의 관련인사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본건 고소인들의 주장사실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은 '1980년에 일어난 정치적 제반사항에 대한논평'과 '광주사태에 대한 논평'중 '고소인 주장의 부당성' 항목에서 상세히 논술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답변에 가름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셋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통령 직위 또는 직책으로 행한 국사행위에 대하여는 헌정운영의 올바른 관행 정립의 견지에서 답변을 유보하였습니다. 이에 관련된 사실관계의 파악은 정부의 관계문서에 의하여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본문건에서는 국가기밀에 관련되는 사항이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서울지방검찰청은 본건 문서 중 기밀사항에 대한 보안을 유지할 것을 당부합니다.

1 . 정치일정과 시국상황 관련

    1. 80년에 접어들면서 신현확 총리를 중심으로 한 친여 신당설이 제기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그러한 신당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신당설의 실현 가능성을 조사하도록 조치를 취한 사실이 있는지, 있다면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한 이유는 무엇이며 조사 결과는 어떤하였는지.

    ▲1980년 3월14일 정부가 헌법개정심의 위원회를 구성한 것을 계기로 구 친여세력이 주축이 된 신당창당이 진행되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므로써 정국이 혼란해지자 당시 정부는 진상을 확인하도록 합동수사본부에 지시하였음.

    ▲합동수사본부가 친여 신당설을 확인한 바 구체성을 결여한 유언비어임을 확인하였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1980년 4월29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당 창당설은 낭설임이 확인되었다」고 공식언급 한 바 있음.

    2. 신현확 총리를 중심으로 한 신당설과 관련하여 이른바 신군부에서 무능한 최규하 대통령을 밀어내고 신현확총리를 그 자리에 앉힌 다음 군부가 실권을 행사하는 구도를 한 때 추진한 일이 있었다는 견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실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1980년 3월 당시 시중에 유포된 친여 신당설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가 친여세력을 규합하여 이원집정부제를 실현하기 위한 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이었음.

    3. 최영희 당시 유정회 의장의 요청으로 80년 1월 하순 동인을 면담한 사실이 있는지. 최의장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3김 불가론 등을 듣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어떠한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1980년 1월경 최영희 당시 유정회 의장의 요청으로 동인을 면담한 바 있음.

    ▲당시 최영희 유정회 회장은 대담 중 차기 대통령으로 군부는 3김중 누구를 지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였음. 이에 대하여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군부가 3김 중 어느 누구를 지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원칙론을 개진하였으며 이른바 '3김 불가론'은 거론한 사실 없음.

    4. 90년 3월 초순경 보안사령관실에서 강창성 전 해운항만청장을 만난 사실이 있는지, 그 자리에서 「김종필은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은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은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며 3金氏 불가론을 제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군이 당분간 정권을 맡아주어야 한다고 졸라댑니다. 심지어 야당 정치인까지 저를 찾아와 당신이 직접 대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박종규 선배도 제가 정권을 잡는 것을 적극 지지하겠다는 것입니다」,「최규하 대통령 은 참 멍청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그 사람은 그대로 놔두고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뒤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는데 사실인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1980년 3월경 姜昌成 당시 해운항만청장으로부터 면담요청을 받고 동인을 면담한 바 있음.

    ▲강창성 당시 해운항만청장의 면접목적은 당시 시중에 유포되고 있던 개각설과 관련하여 인사문제를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姜昌成이 부탁하는 인사문제에 개입할 위치에 있지 않았으므로 면담시 의례적인 대화만 하였으며 시국상황에 대한 대화는 일체 없었음.

    ▲강창성은 육사출신 장교에 대하여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서 윤필용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임. 이와 같은 성향의 인사에게 군부집권의 의사를 알리고 협조를 구하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것임.  강창성의 진술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임.

    5. 80년 2월 24일경 이학봉 대공처장과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이용의 신민당 의원을 통해 김대중과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지시하였는데, 그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지, 김대중과 만나기로 약속하고도 약속장소에 가지 않고 이학봉과 권정달로 하여금 김대중을 만나도록 하였는데 그렇게한 이유는 무엇이며,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하도록 지시하였는지, '김대중에게 시국안정에 협력한다.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소란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 기재된 서약서를 내놓고 복권이 되려면 여기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하였다는데, 그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1980년 2월29일 김대중이 복권된 것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음. 1980년2월 29일에 시행될 시국사범에 대한 복권문제를 정부에서 심의하는 과정에 있어서 법무부와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의 전력에 비추어 복권이 불가하다는 견해를 표하였으나 국민들이 요구하는 정치민주화를 구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이기 위하여 김대중을 복권하여야 한다는 합동수사본부장의 건의를 최규하 대통령이 수용하여 김대중의 복권이 이루어진 것임.

    ▲정부 유관기관의 반대 속에서 김대중의 복권을 건의하였던 합동수사본부장은 김대중의 복권 이후의 행적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음. 따라서 합동수사본부장은 정부의 복권조치 이전에 김대중을 직접 만나 시국안정과 정치발전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하기로 결심을 하고 권정달 합동수사본부 정보처장에게 김대중과의 면담을 주선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임. 그러나 김대중과의 면담일자가 결정된 후 당시 언론계와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3金씨 중 김대중을 합동수사본부장이 만날 경우 합동수사본부장의 진의와는 달리 정치적인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 됨에 따라 면접당일 실무자인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수사단장을 대신 보내 합동수사본부장의 뜻을 전하게 한 것임.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수사단장은 1980년 2월24일 김대중을 만나 정부의 복권조치의 배경을 설명하고 시국안정에 협조해 달라는 합동수사본부장의 뜻을 전하였음.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학봉 수사국장이 「당국안정에 협조한다. 6월 말까지 외국에.나가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작성해 간 사실은 없었음.

    6. 김영선 당시 안기부 2차장이 80년 5월 초순경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남침위협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었다고 하면서 담당국장과 함께 보안사령부로 찾아와 보안사령관과 보안사 참모들이 대책회의를한 일이 있었다는데, 언제, 어떤 내용을 논의하였는지.

    ▲1980년 5월 10일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으로부터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남침첩보에 대한 보고를 받았음.

    ▲당시 중앙정보부가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북한 남침제보의 내용은,북한은 한국정부가 80년 4월 중순경에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하고, 김재규 처형시에는 항의 데모사태가 발생하여 남침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하여 남침시기를 4월 중순경으로 예정하였으나 김재규의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이를 연기하여 오던 중, 80년 5월 들어 학생과 노동자의 소요사태가 격화됨에 따라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80년 5월15일에서 5월20일어간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었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북한 남침첩보가 북경당국에 의해 일본방위청에 공식 제보되었고 미국정부에도 통보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같은 날에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관계관 회의를 소집하여 북한남침첩보를 분석하여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하였으며 또한 북한남침 첩보를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보고하고 국방부와 계엄당국에게 통보하였음.

    7. 일본측으로부터 입수했다는 북괴남침설에 대하여는 군의 자체동향 분석 결과 근거가 없음이 곧 밝혀졌는데, 보고받은 사실이 있는지.

    ▲국방부의 남침 첩보 분석결과는 북한이 전면적인 남침을 즉각 감행할 가능성은 희박하나, 북한이 1980년 3월부터 무장공비를 대량남파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무장 게릴라를 후방에 투입하여 사회교란을 목적으로 한 비정규전을 일으킬 가능성은 농후하다는 것이었음.

    ▲국방부의 남침첩보 분석은 중앙정보부와 공동으로 한 것이었음.

    8. 80년 5월12일 임시국무회의에서 북괴의 남침위협을 보고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때 보고한 내용은 어떠하였는지, 일본에서 입수한 남침관련 첩보가 주된 내용이었는지.

    ▲ 중앙정보부의 기본임무는 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對共 및 對정부 전복)를 수집하여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임. (당시 중앙정보부법 제2조제1항 제1호 참조) 따라서 중앙정보부는 북한 남침첩보와 같은 국가안보에 관련된 주요 對북한정보를 입수한 때에는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한편, 관련기판에 통보하여 대응책을 수립하도록 조치할 의무가 있는 것임.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이와같은 임무에 따라 1980년 5월10일 일본정부로부터 북한의 남침첩보를 입수하자 이 사실을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순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던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보고하였고 국방부와 계엄당국에 통보한것임.

    ▲1980년 5월12일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는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부터 북한 남침첩보를 보고 받은 신현확 국무총리의 지시에 의한 것임. 1979년 12월 중앙정보부가 일본정부로부터 북한 남침첩보를 입수하여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을 때에도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되었음. 1980년 5월10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부재중이므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에 가름하여 임시 국무회의가 소집된 것임,

    ▲1980년 5월 12일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중앙정보부와 국방부가 일본정부로부터 입수한 북한 남침첩보와 북한의 군사동향, 그리고 북한 남침첩보 분석결과를 보고하였음.

    ▲중앙정보부와 국방부가 국무회의에서 보고한 북한 남침첩보 분석결과는 북한의 즉각적인 전면 남침 가능성은 당시의 북한 군사동향으로 보아 희박하나 무장공비에 의한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한 비정규전의 가능성은 있다는 겻이었음.

    9. 이른바 신군부가 근거도 희박한 북괴의 남침설을 강조한 것을 정권 장악을 위한 조치들인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등의 명분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1980년 5월10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신현확 총리에게 보고한 북한 남침첩보는 중국 북경당국이 일본방위청에 제보하고 미국에도 통보한 내용을 일본내각조사실(우리나라의 중앙정보부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임 )이 중앙정보부에 공식통보한 것이며 이른바 「신군부세력」이 날조한 것이거나 과장한 것이 아니었음. 중국은 북한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고 북한의 국내사정에 대하여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나라임. 이러한 위치에 있는 중국이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제보한 것은 상당한 근거를 토대로 한 것이고 중국도 북한의 군사동향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음. 따라서 정부나 군당국은 북한의 남침 첩보를 중시하고 첩보내용의 신빙성을 신충히 검토하는 한편 대응책을 수립한 것으로 이는 정부나 군의 당연한 임무인 것임.

    ▲중앙정보부와 국방부는 일본이 제보한 북한 남침첩보를 분석한 결과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현확 국무총리와 1980년 5월l1일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강조한 사실이 없음.

    ▲ 중앙정보부 및 국방부가 북한 남침첩보와 관련하여 북한이 무장간첩을 침투시켜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한 비정규전(게릴라전)을 전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당시의 북한의 군사동향에 비추어 타당하고도 합리적인 것이었음. 북한의 대남전략은 1차적으로 무장공비 등 5열의한 후방교란을 통하여 그들이 말하는 결정적 시기가되면 전면남침을 감행하여 적화통일을 이룬다는 것임. 그런데 1980년5월 당시의 북한의 군사동향은 전쟁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무장간첩을 대량남파하여 우리나라 후방 교란을 획책하고 있었고 심지어 경북 포항만까지 북한간첩선을 출몰시키고 있었음. 또한 북한은 대남간첩지령을 통하여, 한국의 정세가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니 대담하게 사업을 전개할 것이며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잠입시키라고 남한 내 간첩들에게 지시하고 있었으며, 한국 내 소요사태가 더욱 악화되면 재일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 군중과 합세토록 하고, 재야세력 중 중요인사를 암살함으로써 국민의 우발적 반감을 일으켜 대대적인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조총련에 지령을 내리는 등 우리나라의 사회혼란조성에 혈안이 되어 있었음.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1980년 5월 당시 북한의 남침위협이 없었다는 주장은 국가안보를 무시한 망국적 발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음.

    10. 80년 5월14일과 5월15일 이틀간에 걸쳐 서울의 35개 대학,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고, 특히 서울역 앞에서는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진압하는 경찰에 대항하여 가스차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이고 급기야는 20대 청년이 경찰쪽으로 돌진시킨 버스에 전경대원 5명이 치어 그중 1명이 사망하는 등 불상사가 발생하였는데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하도록 지시하였는지.

    ▲「중앙정보부쏙 합동수사본부의 시국 수습조치」 참조.

    ▲국내치안유지는 내무장관과 계엄사령관의 소관사항이며 1980년 5월14일과 15일에 있었던 학원소요에 대한 대응조치는 내무장관이 경찰을 직접 지휘하여 진압을 하였음.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국내치안 유지가 소관업무가 아니므로 학원소요진압에 관련하여 어떠한 조치나 지시를 할 위치에 있지 않았음. 그러나 수사기관을 지도·감독할 위치에 있던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은 경찰관을 살해한 용의자의 체포를 수사기관에 지시하였고, 학원폭력시위의 주동자와 배후세력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여 1980년 5월17일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후 학원소요를 배후조종한 국민연합과 민주청년협의회 핵심인사를 동행·수사하였음.

    11. 당시 김종환내무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에게 경찰력만으로 시위진압이 불가능하니 군투입을 요청해야겠다는 건의를 한 바 있는지, 있다면 그에 대해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어떤 지시를 내리거나 조치를 취하였는지.

    ▲「사태수습을 위한 정부의 노력」참조.

    ▲내무부장관의 계엄군 출동요청은 계엄군에 대한 출동명령권을 가지고 있는 계엄사령관에게 직접 요청하는 것이고,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또는 합동수사본부에 통보하는 것이 아님. 1980년 5월14일 김종환 내무장관의 계엄군 출동요청은 신혁확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직접한 것임.

    ▲김종환 내무장관의 계엄군 출동요청에 대하여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어떤 지시를 하거나 조치를 할 입장이 아니며 또한 지시 또는 조치를 한 바도 없음.

    I2. 80년 5월의 충정부대 이동상황을 보면 5월3일 육작명(육본작전명령) 제12-80호에 의거하여 9특전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 지시하고, 5월 6일 육본 작전전 제214호를 통해 해병1사단 1개 연대를 소요사태에 투입하도록 지시하고, 동일 육작명 제13-80호에 의거하여 13특전여단을 5월8일 오전 1시경 거여동으로, 11여단을 5월10일 오전 1시 김포로 각 이동시키고, 5월9일 육본 작전전 제214호 수정 1호를 통해 해병 1개 연대를 추가투입토록 지시하고, 5월13일 1군의 경장갑차 26대를 수경사에, 3군의 경장갑차 24대를 수도군단에 각 배속시키고, 5월14일 오전 8시50분경 전 소요사태 진압부대에 투입준비를 지시하고 5웜15일 오전 12시경 육작명 제16-80호에 의거하여 20사단(60연대와 포병단 제외)을 잠실종합운동장과 효창운동장으로 이동시키고, 5월17일 오전 0시1분 육작명 제17-80호에 의해 20사단 60연대를 태릉으로 추가 이동시키는 등 비상계엄 확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군부대가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군병력의 이동은 누가, 언제, 어떻게 결정하였는지.

    ▲계엄군의 출동, 배치 등 계엄군 운용은 계엄사령관의 권한에 속하는 것임.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계엄군운용에 일체 관여한 바 없음.

    13.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던 5꿜16일밤 청와대에서 심야대책회의에 참석하여 보고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다른 참석자들은 각자 어떠한 대책이나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어떤 지시나 조치를 하였는지.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순방은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국가행사였을 뿐 아니라 1980년 당시 전세계적인 오일쇼크의 여파로 초래된 우리나라의 심각한 유류부족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음.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5월16일 오후10시경 국내상황이 위급해짐에 따라 중동순방일정을 단축하고 귀국하였음.

    ▲최규하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공항에 갔던 신현확 국무총리, 국무위원, 중앙정보부장저리 등은 최규하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로 가서 동일 오후 11시경부터 오후 12시경까지 대통령 부재중의 국내사항에 대한 보고를 겸한 간담회가 있었음.

    ▲간담회에서는 학원소요사태에 대한 김종환 내무장관의 상황설명이 있었고,주영복 국방장관이 학원소요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열겠다는 보고가 있었음.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간담회에서 특별한 보고나 건의를 한 바가 없음.

    ▲최규하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국내사정이 시끄러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고, 이 나라를 온전하게 후손에 넘겨줄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하면서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하였음.

2.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관련

    1. 5월17일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주재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거나 보고 받았는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주영복장관이 독자적으로 소집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신군부측의 요청에 따라 신군부가 계획한 계엄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 등을 추진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 아닌지.

    ▲1980년 5월17일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계엄사령관을 지휘 감독할 위치에 있던 주영복 국방장관이 심각한 학원소요로 야기된 국가위기상황에 있어서 계엄당국의 대응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목적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스스로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 것이며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소집을 요청한 사실이 없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소집사실을 1980년 5월16일 저녁 국방부 보안부대장의 상황보고를 받고 알았음.

    2. 주영복 장관에게 전국비상계엄확대 국보위 설치 등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사항, 즉 전군의 일치된 의견으로 모양을 갖추어 줄 것을 요청하도록 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지, 위와 같은 요청을 하려면 미리 그와 상의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언제, 누가 그와 상의를 하였는지, 또 주영복 장관에게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만 해달라고 하였는지, 아니면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아 달라고 하였는지 그에 대한 주영복 장관의 반응은 어땠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합동수사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이 1980 년 5월16일 중동순방에서 귀국하자 다음 날인 동월 17일 극심한 학원소요로 인하여 야기된 국가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시국수습방안으로서 전국비상계엄의 확대선포,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 · 감독권을 보좌하는 자문기구의 설치, 학원소요를 선동하는 정치활동의 규제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한 시국수습방안은 국가위기에 대처하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의 정책건의였으며 국방장관과는 사전에 협의를 하지 않았음. 그러나 시국수습 방안의 내용이 모두 계엄업무와 유관한 것이었으므로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기에 앞서,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지고 있는 관계 국무위원인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시국수습방안의 내용을 통보하였는데 이는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정책사항을 관계 국무위원에게 알려주는 단순한 사실의 통고에 불과한 것이었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하여 달라는 요청을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한 바가 없었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건의한 시국수습방안은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요하는 주요 국가정책사항이었음. 따라서 군지휘관들만이 모이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 결정할 사항이 아니며 또한 당시의 시국과 관련된 민감한 정치적 사항을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하는 것도 바람직 한것이 아님.

    3. 권정달 정보처장에 의하면, 5월 초순경부터 비상계엄 전국확대, 비상기구설치 등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다가 5월10일경 학생시위가 심화되자 보안사령관에게 시국수습방안으로 그와 같은 조치를 검토하여 보고하였다는데, 사실인지, 그러한 보고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고 또 지시를 하였는지.

    ▲「증앙정보부 및 합동수사본부의 시국수습조치」 참조.

    ▲권정달 합동수사본부 정보처장은 1980년 5월10일경 극심한 학원소요로 야기된 국가위기상황에 대한 대응방안으로서 계엄의 권위와 실효성을 잃고 있는 지역 비상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확대하여 계엄의 권위와 실효성을 회복하고 학원소요에 대한 정치권의 선동행위를 규제하며, 대통령 직속하에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 · 감독권을 보좌할 기구를 설치하여 대통령이 직접 강력한 계엄업무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는 건의를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하였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1980년 5월14일과 l5일에 학원소요가 전국규모의 폭동시위로 확대되고 이어서 동월 16일에는 전국총학생회장단회의와 국민연합이 동월 22일을 기해 전국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전개할 것을 공언함에 따라 비상계엄하에서의 이와 같은 국기문란행위를 사전 예방하여 사회안정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1980년 5월17일 권정달 정보처장이 보고한 학원소요수습 방안인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 · 감독권을 보좌하는 대통령 직속의 자문기구설치와 학원소요를 선동 · 조종하는 정치 활동의 규제를 최규하대통령에게 건의하였음,

    4. 이학봉 대공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등으로 하여금 주요군지휘관들에게 회의에서 결정할 사항을 미리 주지 시키도륵 한 사실이 있는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한 군지휘관들 가운데 그날 논의된 의제인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설치, 정치활동 규제 문제를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은 누구누구인지, 최소한 정호용, 노태우, 황영시, 차규헌, 유학성 장군 등은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맞는지.

    ▲질의내용과 같은 사실은 없었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한 시국수습방안은 권정달 합동수사본부 정보처장이 정보처 산하 정세분석반으로 하여금 작성케 한 것이며 다른 합동수사본부 또는 보안사령부 요원과는 상의 한 바도 없고 시국수습방안 내용을 고지한 바도 없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시국수습방안을 주영복 국방장관에게만 통보하였으며 그 이외의 어떠한 인사에게도 통보한 바가 없음,

    5. 국회 해산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배경이나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국회를 해산할 생각이었는지, 최규하 대통령으로 하여금 헌법상의 국회해산권을 행사하도록 건의하여 해산하려 하였는지, 아니면 유신 때와 같이 초헌법적 조치로 하려고 하였는지 .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국회해산을 구상한 바도 없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 한 사실도 없음.

    6. 비상기구를 설치하려 한 배경이나 이유는 무엇이며, 비상기구는 어떻게 설치하러 하였는지, 그 구체적 방안은 어떠하였는지.

    ▲제3항 답변 참조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은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 감독권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대통령 자문 · 보좌기구 설치였으며 이른바 「비상기구」의 설치를 구상하거나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한 사실이 없음.

    7, 5· 17 계엄확대와 동시에 설친하고자 했던 기구와 5월31일 설치된 국보위는 성격, 권한 등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1980년 5월 31일 설치된 국보위는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시국수습방안으로 건의한 대통령의 자문 ·보좌기구 설치방안을 최규하 대통령이 받아들여 구성한 것임.

    ▲중앙정보부장서리가 건의한 대통령 자문 · 보좌기구안과 5월31일 설치된 국보위는 성격 ·권한이 동일함.

    8. 정치활동을 규제하고자 한 이유나 배경은 무엇이며, 어떤 방안으로 정치활동을 규제하려 하였는지.

    ▲1980년 5월에 일어난 극심한 학원소요는 「金大中 내 란음모사건」의 확정판결을 통하여서도 분명한 바와 같이 정치권의 선동과 배후조종에 따른 것이었음. 따라서 학원소요의 진정을 위하여서는 정치권의 학원소요 선동 조종행위에 대한 규제가 불가피하였던 것임.

    ▲학원소요를 선동 ·배후조정하는 불법적 정치활동에 대한 규제는 소관행정 각부처와 계엄사령부가 방안수립을 하는 것이므로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별도의 방안제시를 하지 않았음.

    9. 주영복 장관에게 통고한 시국수습방안 중에 부패하고 소요를 배후조종하는 정치인 등 문제 인사들을 체포하여 조치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는지.

    ▲1980년 5월i7일 권정달 합동수사본부 정보처장이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통보한 내용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시국수습방안이었음. 따라서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에서 처리하는 국기문란사건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는 합동수사본부에서 시국수습방안과 별도로 보고하였음.

    10. 당시 위와 같은 사항에 대해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는 미리 보고하거나 동의를 받았는지, 보고하지 않았다면 그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지.

    ▲시국수습방안 건의는 全斗煥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정부차원에서 행한 정책건의였으므로 정부각료인 주영복 장관에게만 통고하였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통보되지 않았음.

    ▲국기문란사건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수사는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에서 처리하는 것이므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도 보고되었음.

    11.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현확국무총리에게 보고한 사실이 있는지, 있다면 신총리의 반응은 어떠하였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한 바 없음.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직속기관이므로 중앙정보부장과의 업무보고와 정책 건의는 국무총리를 경유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접하는 것임.

    12. 주영복 장관이 회의 시작 전 ·자신의 방에 들른 유병현 합참의장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문제를 꺼냈다가 유병현 합참의장이 국회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문제를 군지휘관들이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반대하자, 이른바 신군부측에 각본대로 회의가 진행될 수 없음을 알려주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만 논의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일부 군지휘관들이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에 대하여 반대견해를 표명하였다는 사실은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주영복 국방장관실에서 군수지부가 대통령에게 건의한 시국수습방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는 사실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후에도 논의내용을 들은 바가 없었음.

    13. 주영복 장관으로부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과는 언제, 어디에서 통보받았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全軍 주요지휘관회의 결과를 국방부 보안부대장의 상황보고를 통해 알았으떠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통보받은 바 없음.

    14. 시국수습방안 보고에 대한 최대통령의 반응은 어떠하였으며, 당시 배석자는 누구누구였는지,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받았다면 그 경위는 어떠한지, 최대통령이 그와 같은 조치에 대해 반대 하지는 않았는지, 반대하였다면 반대한 조치는 무엇이고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가 건의한 시국수습방안을 수용하여 전국비상계엄을 확대선포하고 국보위를 설치 하였으며 국기문란사건과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를 재가하였음.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이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를 수행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시에는 배석하지 않았음.

    15.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과를 통보받고, 동일 오후 4시경 김모 변호사를 대동하고 청와대에 가 최규하대통령에게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끝났는데 군은 현재 국가적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비상조치를 원하고 있다고 하면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해산, 5 · 16 직후의 국가 재건최고회의와 유사한 국정자문협의체의 설치,각급 학교의 휴교조치 등을 건의하였으나 최대통령이 그같은 상황은 5 · 16 하나로 족하고 특히 군와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중단 사태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비상계엄 확대를 제외하고는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데 사실인지, 당시 같이 청와대에 간 변호사는 김영균 변호사가 아니었는지, 그를 대동하고 간 이유는 무엇인지.

    ▲사실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회해산, 비상기구의 설치를 건의한 바도 없고 대통령 긴급조치의 선포를 건의한 바도 없음.

    ▲김영균 변호사는 1980년 5월17일 당시 「삼성 그룹」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의 어떠한 직책도 가진 바 없었음. 따라서 민간인인 김영균 변호사를 대통령 보고시에 대동하거나 배석시킬 수 없으며 배석한 사실도 없음.

3. 제42회 임시국무회의 관련

    1.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5 · 17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친 다음 신현확 국무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해산, 비상특별기구 설치 등의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한 사실과 보고 결과는 누구로부터 언제, 어떤 경위로 보고 또는 통보 받았는지, 그리고 보고 또는 통보받은 결과는 어떠하였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주영복 국방장관이나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과나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 대한 보고결과를 통보받은 바 없음.

    2. 5 · 17 전국비상계엄 전국확대 안건을 심의하기 위한 임시국무회의가 소집된다는 사실과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언제,누구로부터 보고 받았는지, 그리고 임시국무회의의 결과는 누구로부터 언제, 어떤 경위로 보고 받았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비상계엄확대안건을 심의하기 위한 임시국무회의의 소집 사실과 국무회의의 결과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의 상황보고를 통하여 인지하였음.

    3. 당시 중앙청 정문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었고 중앙청 현관에서 국무회의장까지는 양쪽에 약 1미터 간격으로 집총한 군관들이 도열해 있었다는데, 중앙청과 국무회의장 주변의 군병력 배치는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에게 지시 하거나 협조를 요청하여 조치한 것인지, 노태우 당시 수경사령관과는 사전에 협의가 있었는지.

    ▲중앙청 병력배치는 계엄사령부의 조치사항이며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의 소관사항도 아니며 관여한 바도 없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노태우 당신 수경사령관과 중앙청 군병력 배치는 물론, 수경사의 어떠한 병력동원에 대하여서도 협의를 하거나 논의한 바 없음

    4. 5월18일 새벽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더불어 수도군단 예하 33사단 병력이 국회에 투입되어 국회를 점령한 사실을 언제, 누구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 보고받았는지.

    ▲33사단 병력의 국회출동은 5 · 17전국 비상계엄확대에 따르는 국가주요시설 경계를 위한 계엄군 출동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부가 취한 조치임.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전국비상계엄확대조치에 따라 전계엄군에게 출동명령이 내려진 사실은 상황보고를 통해 인지하였으나 계엄부대의 세부배치 상황은 보고받은 바 없음.

    5. 국회를 점령한 병력이 국회의원의 국회출입을 통제하고 5월20일 오전 10시에는 황낙주 의원 등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여 결국 제 104회 임시국회가 개회조차 돗한 사실을 언제, 누구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 보고 받았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 국회경비병력과 황낙주 국회의원 간에 일어난 사태에 대하여 보고 받은 바 없음

    6. 포고령 10호와 포고령 10호의 핵심내용인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조치에 대하여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는지, 보고는 언제, 어떤 경위로 하였으며, 최대통령의 반응과 의견은 어때하였는지, 최대통령에게 보고한 정치활동 중지 조치에 구체적으로 국회 및 정당의 활동금지도 포함되어 있었는지.

    ▲계엄포고 제 10호의 공고는 계엄사령부가 취한 조치임.

    ▲증앙정보부,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계엄포고 제 10호의 공고과정에 관여한 사실이 없음.

    7.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 재야인사에 대한 연행 · 조사방침은 누가, 언제, 어떻게 결정하였으며, 구체적인 연행 ·수사 계획은 누가, 언제, 어떻게 입안, 기획하였는지, 그리고 연행 ·조사 방침이나 구체적 연행 ·조사계획의 내용은 어떠한지 .

    ▲'국기문란 및 권력형 부정축재 관련자의 수사' 참조

    8. 학생시위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들에 대한 선정작업은 누가, 언제 어떻게 하였는지, 이학봉 대공처장이 5월11일경 「재야 와복학생과 대학생이 연결되어 학생시위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학생시위 등 소요의 근절책은 배후 조종자들인 재야인사, 복학생, 학생 대표들을 검거하여야 가능하다」는 보고를 한 바 있다는데 사실인지, 당시 그러한 보고를 받고 국민들 사이에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으니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조치도 검토하라고 제시하였다는데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그러한 지시를 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지.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학원 소요사태가 정치적 주장을 앞세운 가두시위로 확대된 1980년 5월 초순경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으로부터 학원소요의 배후 조종세력인 국민연합과 민주청년 협의회 핵심인사그리고 권력형 부정축재자의 수사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았음.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에게 학원소요 배후세력인 국민연합과 민주청년협의회 핵심 인사와 권력형 부정축재자에 대한 수사를 건의하여 재가를 받고 관련자에 대한 수사를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에게 지시하였음.

    9. 5월13일 오후8시경 보안사령관실에서 이학봉 대공처장, 권정달 정보처장과 함께 보안사(정보처), 경찰, 중앙정보부 등에서 수집한 자료 및 이를 토대로 한 기초조사 결과를 가지고 국기문란자와 권력형부정축재자들을 선정한 사실이 있다는데 사실인지, 당시 선정기준은 어떠하였으며, 선정된 대상자는 누구였는지, 선정 작업결과를 보고받은 것은 언제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어떠 하였는지

    ▲학원소요 배후세력 관련자는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이 관계부처의 자료에 의거하여 수사실무적 차원에서 결정한 것임,

    ▲권력형 부정축재자는 권정달 정보처장이 관계부처의 자료에 의거 선정하고 합동수사본부장인 최종확정한 것임.

    10. 5월14일 육군본부에서 계엄사령관 이희성, 수경사령관 노태우, 특전사령관 정호용, 20사단장 박준병 등과 함께 회합하여 김대중을 체포. 연행하자는 데 합의하고 이에 따르는 무마대책으로서 특전부대를 신속히 투입하기로 모의하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지.

    ▲전혀 사실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11. 처음에는 신현확 국무총리도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반대, 국보위 설치반대 등 이른바 신군부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 조사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수경사령관 노태우 장군이 제외하였다는데 어떠한지.

    ▲.전혀 사실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12. 연행 · 조사 계획을 계엄사령관이나 국방장관에게 보고하였는지, 하였다면 누가, 언제, 어떤 경위로 보고하였는지.

    ▲합동수사본부에서 1980년 5월17일경에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하였음.

    13. 검거 경위 등에 대하여 보고받은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연행 당시 여야 정치인 등이 순순히 연행에 응하였다고 보고 받았는지, 연행과정에서 폭행 등 가혹행위는 없었는지.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으로부터 국기문란 및 권력형 부정축재 관련자의 연행사실을 보고받았음.

    ▲연행이나 수사의 집행 세부사항은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의 처리사항이므로 합동수사본부장에게 보고되지 않음.

    14. 조사 상황에 대하여는 누구로부터 보고를 받았으며, 그에 대해 어떤 조치나 지시를 하였는지, 중앙정보부에서 김대중이 조사받는 상황을 모니터를 통해 직접본 일이 있는지.

    ▲국기문란 및 권력형 부정축재 관련자의 수사는 이학봉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의 수사 지휘하에 이루어졌음. 합동수사본부장은 수사 중간 보고는 받았으나 특별한 수사지시를 내린 바 없음.

    ▲합동수사본부장은 김대중 조사상황을 모니터로 본 사실이 없음.

    15.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5월20일 오전 9시 상도동 자택에서 5.17조치를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밭표하려하자 M16소총으로 무장한 수경사 병력이 그날 오전 8 시경 집주위를 에워싸 김총재를 가택연금한 사실이 있는데, 김총재의 가택연금은 누가, 언제 결정을 하였는지,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사전 또는 사후에 보고를 하고 재가를 받았는지.

    ▲계엄사령부가 계엄포고 제10호에 위반하여 국내 ·외 기자회견을 하려는 행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로서 중앙 정보부, 보안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일체 관여한 바 없음.

    16. 군검찰 수사과정에서 이학봉 대공처장이 김상현 의원을 만난 사실을 보고 받았는지, 받았다면 보고 내용은 어떠하였는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수사과정에서 수사의 필요상 만난 것이며 수사 과정에서의 사건 피의자의 면담·사실은 일일이 합동수사본부장에게 보고되지 않음.

    l7. 80년 6월17일경 보안사령관실에서 이학봉 대공처장과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내용중 다른 것은 국보위에서 추진할 수 있으나 정치풍토개선과 관련하여서는 국보위에서 할 수 없으니 두사람이 협조하여 중상과 모략,왜곡과 선동, 권모술수와 극한 투쟁 등 정치퐁토 개선작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사실인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6월 12일 '국가기강확립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여 공직사회의 부조리를 척결하기 위한 서정 쇄신 작업과 정치풍토의 개선 그리고 권력형 부정부패의 조사를 할 것을 천명하였음.

    ▲198O년 7웜18일에 권력형 부정부패 정치인 등 16명을 합동수사본부가 연행 · 조사한 것은 동넌 6월1?일자 최규하 대통령의 「국자기강확립에 관한 담화문」에서 언급된 권력형 부정부패자 수사지시에 따른 것이었음.

    18. 연행 조사 계획 및 처리 방침을 사전에 계엄사령관, 국방장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재가를 받았는지, 계엄사령관, 국방장관, 대통령은 보고에 대하여 어떤 지시나 조치를 하였는지.

    ▲권력형 부정부패 정치인의 수사개시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수사 결과는 합동수사본부장이 계엄사령관, 국방장관을 경유하여 박충훈 대통령권한대행에게 보고되었음.

    19. 80년 8월19일 수사전모를 발표하면서 그들의 권력을 악용한 금품수수행위, 정치풍토를 오손한 사회기강 문란행위. 지도급 인사로서의 부도덕한 사생활, 시대적 사명감을 저버린 반국가적 형태에 대하여 재산을 헌납받고 공직을 사퇴케 하되 형사처벌은 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그와 같은 처리방침은 누가 정하였는지.

    ▲권력형 부정부패 정치인의 처리는 합동수사본부장의 수사보고를 받은 박충훈 대통령권한대행의 결정에 따라 부정축재 재산의 환수와 공직사퇴로 사건을 종결하였음.

4.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운영관련

    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언제, 어떤 경위로 처음 논의되어 그 설치방침이 결정되었으며, 구체적인 국보위 설치 계획은 누가, 언제, 어떻게 입안하여 계획 하였고, 국보위 설치방침과 설치방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언제인지.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의 설치 경위」 참조.

    2. 국보위 설치 계획은 보안사 핵심참모이던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이학봉 등 4명이 주도하였고, 실무작업은 권정달 정보처장이 한 것이라는데, 어떠한지.

    ▲사실 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3. 당초에는 4 · 19기념일이 되면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이므로 그 상황을 타고 국가보위를 위한 비상권력기구를 설치하기로 예정하였다가 예상밖으로 4 -19가 조용하게 지나가자, 5 · 17계엄확대와 동시에 다시 이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최대통령의 반대 등 사정이 여의치 아니하여 일단 보류하고 있다가 광주사태가 생기는 바람에 그 진압을 기다려 5월 말 설치를 추진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사실 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4. 당초의 국보위 또는 비상권력기구 설치 계획은 어떠하였는지, 그후 실제로 설치된 국보위와 당초 계획하였던 비상권력기구는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이고, 언제, 무슨 이유로 그렇게 변경되었는지.

    ▲비상권력 기구의 설치를 구상한 바 없으며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한 사실도 없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1980년 5월17일 최규하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 감독권을 보좌 ·자문하는 대통령의 직속기구의 설치를 건의하였고, 1980년 5월31일에 설치된 국보위도 대통령의 계엄업무 지휘 · 감독권을 보좌 · 자문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양자는 성격 및 권한이 동일한 것이었음.

    5. 국보위는 당초 계엄확대와 동시에 이른바 혁명평의회의 성격을 갖는 비상권력기구로 추진되었는데,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최대통령, 신총리가 국보위의 합법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그 설치를 반대하자 그후 합법의 외관을 갖추기 위하여 계엄법에 근거한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으로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하는 계획으로 변경한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국보위 설치를 합법의 외관을 갖춘 것으로 변경하는 계획은 언제, 어떻게 결정을 하고, 누가, 어떻게 구체적 작업을 하였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혁명평의회 성격을 갖춘 비상권력기구를 건의한 사실이 없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시국수습방안을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바 없음. 따라서 신현확 국무총리가 국보위 설치 건의에 반대하였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낭설임.

    6. 5 .21 개각으로 총리가 교체된 후 5월26일경 권정달 정보처장이 주영복 국방장관, 김용휴 총무처장관과 함께 브리핑 차트를 준비하고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를 찾아가 국보위 설치계획을 보고하자,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개헌을 하든지 아니면 국보위를 국무회의 아래에 두어 국보위가 결정한 사항에 대하여 국무회의의 최종심의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하면서 거부의사표시를 하였다고 하는데 어떠한 것이었는지

    ▲사실무근의 날조된 거짓말임,

    ▲권정달 합동수사본부 정보처장은 1980년 5월24일경 김용휴 총무처 장관으로부터 청와대에서 국보위 설치령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국보위의 내용은 정책건의를 한 합동수사본부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초안을 만들어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권정달 정보처장은 김용휴 총무처장관의 요청에 따라 합동수사본부가 구상하는 국보위 설치령 초안을 작성하여 주영복 국방장관을 수행하여 박충훈 국무총리에게 국보위 설치령 초안을 보고하였음. 권정달 합동수사본부 정보처장 보고시에는 김용휴 총무처장관이 배석하였음.

    ▲권정달 합동수사본부 정보처장이 박충훈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국보 설치령 초안은 1980년 5월 31일에 공포된 국보위 설치령과 성격과 권한이 유사한 것이었음.

    ▲박충훈 국무총리는 합동수사본부가 입안한 국보위 설치령 초안에 대하여 별다른 이의를 제기한 바 없었음.

    ▲박충훈 국무총리에게 보고한 합동수사본부의 국보위 초안은 총무처에 송부하였고 그후 총무처에서 내용일부에 대한 수정이 가하여진 후 국무회의에 상정되었음.

    7. 대통령령인 국보위 설치형 자체는 누가, 언제, 어떤 경위로 성안작업을하였는지.

    ▲「최규하 대통령의 국보위 설치지시」참고.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로 총무처가 주관 작성함.

    8. 국보위원, 상임위원, 분과위원, 전문위원은 누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선정하였고, 국보위가 공식 발족한 것은 5월31일이었지만 5 · 17 직후 이미 국보위원, 상임위원은 물론 국보위 분과위원들까지 결정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국보위위원과 국보위 상임위원을 청와대가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인선하였고 임명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이 임명한 것임.

    ▲국보위 분과위원과 국보위 분과위원회 전문위원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임명하였음.

    9.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임명된 경위는 어떠한지, 상임위원장이 될 것을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상의하여 결정한 것인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의 국보위 상임위원장 임명은 국보위 의장이며 국가원수인 최규하 대통령이 한 것임.

    10. 80년 6월13일 국보위가 확정 발표한 안보태세 강화, 경제난국 타개, 정치발전과 내실도모,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 확립 등 4대 기본목표와 권력형비리 등 공직자의 축재 부조리 척결과 불신풍조의 불식, 문란해진 정치풍토의 쇄신과 도의정치의 구현, 민주화의 추진을 의해 사리사욕과 빗나간 주장을 일삼는 일부세력 배격, 학원의 자율성은 보장하되 불법시위와 소요행위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근절, 윤리와 도덕이 존중되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종교를 빙자한 정치활동 통제, 학원의 기업화와 과열과외 등 교육풍토 쇄신, 기업인의 비윤리적 행위와 노조의 불법시위 활동 시정, 국익우선의 언론지향, 밀수 ·마약 부정식품 등 각종 사회악 근절 등 9개 추진지침은 누가, 언제, 어떤 과정을 저쳐 마련한 것인지, 실질적으로는 보안사팀에서 마련한 것을 그대로 국보위에서 발표한 것이 아닌지.

    ▲1980년 5월31일에 열린 국보위 제I차 회의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국보위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민생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국민이 원하는 바가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이를 행정전반과 계엄업무수행에 반영하도록 기여하라고 국보위의 운영방향을 시달하였음.

    ▲1980년 6월12일 국보위가 발표한 국보위의 4대 기본목표와 9개 추진지침은 최규하 대통령의 이와 같은 지시에 따라 국보위 분과위원장 회의에서 자체적으로 논의 결정하여 국보위 본회의에 상정한 것임.

    ▲보안사령부는 국보위 운영에 관여한 사실이 없음.

    11. 국보위를 설치령에 규정한 목적대로 또 그 범위 내에서 대통령의 자문 ·보좌 기구로서 운영하였는지, 아니면 설치령에 규정된 권한 범위를 넘어서 다른 목적으로 운영하였는지.

    ▲「국보위의 기구 및 운영」 참조.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5월31일에 열린 국보위 제1차 회의에서 국보위는 국법질서 안에서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이 계엄업무를 지휘 · 감독함에 있어서 자문 및 보좌기능을 담당하고 내각과 계엄령 당국간의 협조를 긴밀히 함으로써 국정을 더욱 효율화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음.

    ▲국보위는 국보위 설치령과 대통령의 운영방침에 따라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의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관한지휘 ·감독권을 자문 ·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음.

5.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1. 합수부에서 80년 5월22일 김대중이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계엄해제 등 5개항을 지시, 학생소요를 배후조종하였다는 내용의 김대중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사실이 있는데, 김대중의 한민통 관련 국가보안법위반 부분에 대하여는 언제, 어떤 경위로 그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기로 한 것인지,

    ▲상황개요 「국기문란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 관련자의 수사」 참조

    2. 이학봉 대공처장으로부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는데, 언제, 어떤 내용의 보고를 받았으며, 그에대하여 어떤 지시나 조치를 하였고, 수사 결과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처리방침에 대하여 재가받았는지.

    ▲합동수사본부장은 1980년 6월 말경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및 김대증의 반공법 위반사건 수사결과를 김근수 중앙정보부 수사국장으로부터 최종보고를 받고, 동월 30일경 김근수 중앙정보부 수사국장을 대동하여 최규하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하였음.

    ▲합동수사본부장은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로 관련자 전원을 계엄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하였음.

6. 최규하 대통령 하야, 헌법개정 및 창당 관련

    1.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논의한 사실이 있는지, 있다면 누구와 언제, 어떤 경위로 논의를 하게 되었는지.

    ▲합헌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군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하야문제를 군부 내의·특정세력이 논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사실은 있지도 않았음.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가 특정세력의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최규하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도덕성을 훼손하여 과거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려는 일부 인사의 악의적인 모략임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동기와 배경은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 스스로가 밝힌 하야성명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그 이외 어떠한 배경도 없었음.

    2. 김정렬 전 총리가 1?8D년 7월30일 최규하 대통령 사임 결심을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통보한 사실이 있는지 .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김정렬 전 총리는 물론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최규하 대통령 사임결심 사실을 통보 받은 바 없음.

    3. 국보위 설치 직후 사법분과위원들로 하여금 은밀히 헌법개정작업에 착수하도록 한 사실이 있다는데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와 별도로 은밀히 헌법개정 작업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는 결국 집권을 염두에 두고 다음 공화국의 헌정기도를 그려 보고자 한것이 아닌지.

    ▲국보위 법사분과위원회 헌법개정안에 대한 검토작업을 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1980년 8월27일 이후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전두환 대통령 취임 이전에는 헌법개정안에 대한 작업을 한 바가 없음.

    ▲국보위 법사위분과위원회의 개정헌법안에 대한 의견은 전두환 대통령에 보고된 후 정부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회에 송부하여 심의자료로 활용토록 하였음,

    4. 국보위 법사분과위원들이 헌법개정 작업을 하기 전에도 보안사에서 10 ·26이후 헌법개정방향을 검토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어떠하였는지,

    ▲사실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5. 신당 창당을 결정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며, 신당 창당 작업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지시하였는지, 80년 6,늴20일 권정달 정보처장과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이상연 보안사 정보처 보좌관, 윤석순 중앙정보부 총무부국장 등에게 권정달 정보처장을 팀장으로 하여 창당 작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민주정의당 창당작업은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된 1980년10월 22일 이후에 구상되고 착수된 것임.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가 1980년 6월20일 신당 창당을 지시한 사실은 없으며 이러한 주장은 날조된 거짓말임.

    6. 노태우수경사령관, 정도영 보안처장,권정달 정보처장, 허상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이종찬 증정총무국장, 허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 등이 80년 7월15일 10시경 보안사령관실에서 모여 헌법개정안, 정치일정 단축방안,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문제 등에 대하여 토의를 하였다는데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토의결과는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

    ▲전혀 사실무근의 날조된 주장임

7. 광주사태

    1.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의 광주상황에 대하여 파악된 내용은 어떠하였으며, 광주사태가 발생한 것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처음 알았는지, 그후 광주사태의 상황은 어떻게 파악하였는지.

    ▲합동수사본부는 자체적인 국내정세 정보 수집체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치안본부로부터 학원소요사태 등 국내정세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음. 따라서 광주지역 상황도 치안본부의 국내정세보고에 의하여 파악하고 있었음.

    ▲1980년 5월21일 계엄군과 경찰이 광주시를 전면 철수한 이후부터는 치안본부의 정세보고의 부족으로 광주지역의 정확한 상황파악이 불가능하였음.

    2. 당시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군 최고 지휘부와는 어떤 방법으로 대책 등을 협의하거나 논의하였으며, 최규하 대통령과는 어떤 방법으로 광주사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거나 논의하였는지.

    ▲군이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경우 작전계획의 수립, 작전부대에 대한 작전 지휘등 군사조치는 군의 전권사항이므로 군통수체계에 있지 않은 어떠한 기관도 이에 관여할 수 없음. 또한 군사작전에 관련된 전투정보의 모집 ·분석도 일반정보기관(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이 아닌 군자체의 작전 및 정보기관(작전참모부와 정보참모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임. 따라서 광주사태기간 중 군통수체계상에 있지 않았던 중앙정보부장서리나 보안사령관은 소요진압작전에 관련된 군사조치 사항에 대하여 주영복 국방장관이나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대책을 논의하거나 협의를 한 사실 없으며 전투정보도 모집 분석한 바가 없었음,

    ▲군이 군사작전을 하는 경우 일반정보기관의 임무는 전투정보가 아닌 국내 ·외 일반정세를 모집, 군에 제공하여 군사작전에 참고토록 하는 데 국한되어 있음. 따라서 「광주사태」 기간 중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군사동향에 대한 정세판단에 전념하였음. 북한은 '광주사태'가 발생한 1980년 5월18일에 전군연대장급 이상 전원회의를 소집하여 유사시 군사행동에 돌입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동월 19일에는-북한전역에서 무기검열, 대피소 점검, 군수동권검열을 실시하는 등 전쟁준비계획을 총점검하였음. 그리고 「광주사태」가 폭동단계에 이른 동월 21일에는 전군에 비상태세를 발령하고 김일성이 전군에 전투태세 돌입을 지시하였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북한의 이와 같은 군사동향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한편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통보하여, 미국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항공모함과 미7함대를 한국 해역에 증파하여 대북경계에 임하도록 조치하였음. 또한 합동수사본부는 충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검찰등 전수사력을 '광주사태'를 틈탄 북한간첩의 침투 및 국내 불순분자의 사회혼란 조성 행위를 차단하는 데 집중하였음. 그 결과 광주사태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된 북한간첩 이창룡(당시 46세, 평양시 거주)을 검거하였음. 보안사령부가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취한 조치는 없었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광주사태 기간 중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를 직접 방문하여 정부가 소요사태 관련자를 관대하게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선언하고 광주시민이 자율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도록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책건의를 하였음,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의 정책건의를 받아 들여 1980년 5월26일 광주를 방문하여 담화문을 발표하였음.

    3.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5월18일 오후 2시경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느냐, 빨리 진압하라는 명령을 진종채 2근사령관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내렸다는데, 이희성 사령관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상의하여 소요 진압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지.

    ▲전항 답변 참조.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광주소요진압 명령과 관련하여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상의한 사실이 없음.

    4. 5월18일 광주에 11공수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러한 곁정에는 어떻게 관여 하였는지.

    ▲제2항 답변 참조.

    ▲계엄군과 광주출동은 계엄사령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특전부대와 20사단 병력의 광주출동에 관여하거나 협의를 받은 사실이 없음.

    5. 5월19일 계엄사령부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대책회의가 열린 일이 있는데 참석한 사실이 있는지, 있다면 당시 어떤 내용이 논의되었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1980년 5월19일 계엄사령부 대책회의에 참석한 사실이 없음.

    6. 5월19일 당시 광주에 3공수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결정에 어떻게 관여하였는지.

    ▲제2항 및 제4항 답변 참조.

    7. 5월20일 당시 서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을 광주에 또다시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결정에는 어떻게 관여 하였는지. 광주에 처음 투입되었던 7공수 여단 2개 대대 이외에 11공수여단, 3공수 여단, 20사단을 축차적으로 투입하였는데, 현지 지휘관인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으로부터 증파 요청을 받은 바 없음에도 투입한 이유는 무엇인지.

    ▲제2항 및 제4항 답변 참조.

    8, 5일20일 밤 광주역에 서 3공수여단 병력이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다가 차량시위 등으로 밀리게 되자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5월20일 광주역 상황과 관련하여 윤흥정 당시 전교사사령관에 의하면, 광주역은 전교사에서 약 4-5km정도 떨어져 있어 야간에는 총성을 들을 수 있는 거리인데 5월 20일 저녁 사령관실 밖에 나가 있다가 총성을 듣고 참모에게 상황을 확인한 결과 시민들이 과격하게 나오니까 공포를 쏜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는데, 5월20일 광주역 상황에 대하여 보고 받았다면 보고 내용은 어떠하였으며, 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보안사령부는 5월20일 자위권 발동사태에 대하여 보고를 받거나 상황을 인지한 사실이 없음.

    9. 5월20일 오후 12시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윤흥정 전교사사령관으로부터 공수부대의 시외곽 철수를 건의 받았다고 하려는데, 그러한 사실을 보고 받아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면 그에 대하여 어떤 지시나 조치를 하였는지.

    ▲보고 받은 사실이 없음.

    10. 5월21일 오후 7시경 계엄사령관실에서 계엄사 대책회의가 열러 ① 계엄군을 광주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 ② 자위권 발동, ③ 1개 연대를 추가 투입, ④ 전투력 공백 보전책으로 2개 훈련단 훈련동원 소집, ⑤ 폭도 소탕작전은 5월23일 이후에 의명실시, ⑥ 경계 ·강화 조치를 결정하였다는데, 그 회의에 참석하거나 회의결과를 보고 받은 사실이 있는지, 있다면 그에 대하여 어떤 지시나 조치를 하였는지.

    ▲5월21일 19시에 열린 계엄사 대책회의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참석한 사실이 없음.

    11. 5월21일 오후 1시경 11공수여단 병력이 전남도청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에 발포하였고 밭포로 인하여 시민 다수가 사망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언제, 누구로부터 처음 보고 받았는지, 보고내용은 어떠하였으며, 그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고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보안사령부는 5월21일 자위권 발동사태를 보고 받거나 상황을 인지한 사실이 없음.

    l2.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가 행해진 이후에 계엄사령관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였는데, 그 경위는 어떠하였으며,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계엄사령관의 조치사항이며 자위권 발동문제에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이 관여하거나 협의를 받은 사실이 없음.

    13.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보유 천명에 관하여 조언을 하거나 관여한 사실이 있는지.

    ▲전항 답변 참조.

    14. 5월21일 3공수여단 병력이 전남대 앞에서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5월21일 전남대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보고 내용은 어떠하였으며, 그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고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5월21일 3공수여단의 자위권 발동사태에 대하여 보고를 받거나 상황파악을 한 사실이 없음.

    15. 위와 같이 광주사태가 진행 되는 동안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현지에 수차례 내려갔는데 정호을 특전사령관과는 언제,어떤 경위로 광주상황을 의논하고 대책을 협의하였는지.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 기간 중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인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을 만난 것은 1980년 5월25일 단 한번 뿐이었으며, 그 외에는 양인 간에 어떠한 접촉이나 대화가 없었음.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1980년 5월25일에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을 방문한 것은 광주에 출동한 특전사 병력이 작전수행상 필요한 편의복(평복)과 가발을 지원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음.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현지 31사단장이나 윤흥정 전교사사령관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광주 현지의 보안부대와 광주를 방문한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보고를 받은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대책을 협의하여 발포명령 등 작전지휘를 하였다는 주장은 광주사태를 정치 쟁점화하려는 일부인사에 의하여 조작된 거짓말임.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광주사태」기간 중 출동 계엄군에 대한 작전지휘를 한 바도 없고 발포명령을 내린 사실도 없었음.

    16. 5월21일 광주시내에 있던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철수하도록 결정한 경위는 어떠하며, 그 결정에 어떻게 관여하였는지.

    ▲계엄사령부의 조치사항이며 보안사령부는 계엄군 철수문제의 결정에 관여하거나 계엄사령부와 협의한 사실이 없음.

    17. 5월21일 오후 국방장관실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진종채 2군사령관, 장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자위권 발동 등에 대해 논의한 사실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정도영 보안처장에 의하면, 보안사령관을 대신하여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진종채 2군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이어 자위권 발동 문제가 논의되었다는데 어떠한지, 그때 보안처장을 통해 어떤 의견을 표명하였는지.

    ▲정도영 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은 국방부의 지시에 따라 1980년 5월21일 오후 5시경에 열린 「광주사태」 대책회의에 배석하였음. 동 회의에는 국방장관, 합참의장, 3 군 참모총장, 2군 사령관이 참석하였고 정도영 보안처장을 포함한 국방부와 각군의 계엄관계관이 다수 배석하였음. 대책회의에서는 진종채 2군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며 계엄군의 광주시로부터의 철수문제가 논의되었음,

    ▲정도영 보안처장은 「광주사태」 대책회의의 배석자에 불과하였으므로, 회의 과정에서 어떠한 의견도 개진한 바 없음.

    ▲정도영 보안처장은 회의 종료 후 보안사령관에게 회의결과를 보고하였음. 회의 결과에 대한 보안사령관의 지시 또는 조치는 없었음.

    18. 5월21일 전교사사령관을 윤흥정 장군에서 소준열 장군으로 전격교체한 결의는 어떠하며, 그 결정에 어떻게 관여하였는지, 윤흥정 장군이 광주사태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기 때문이 아닌지, 당시 황영시 참모차장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협의하여 교체 결정을 하였다는데 사실인지.

    ▲전두환· 당시 증앙정보부장서리는 1980년 5월19일경 청와대로부터 군의 3성 장군 1명을 개각에 포함시킬 계획이니 군과 협의하여 추천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였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윤흥정 장군출 추천받아 청와대에 보고하였음.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지는 이희성 계엄사정관이 윤흥정 장군을 추천한 배경과 경위를 알지 못함.

    19. 5월21일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수차례 계엄군간의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보고를 받았는지, 왜 그와 같은 오인사격이 발생한 것인지, 이는 지휘계통이 2원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러한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계엄군 오인사격 사태를 보고받은 바 없음.

    ▲계엄군간의 오인사격 사태는 전투상황이므로 보안사령부나 중앙정보부에는 보고되지 않음.

    2D. 80년 5월27일 전남도청 및 광주시내 재진입 작전(충정작전)을 결정한 경위는 어떠한지, 그 결정에 어떻게 관여하였는지, 5월25일 오전 11시경 국방장관실에서 진압작전을 5월27일 오전 0시1분 이후 실시할 것을 결정할 때 회의에 참석하였다는데 사실인지.

    ▲「상무충정작전계획의 입안 경위」 참조.

    ▲상무충정 작전의 개시 일자를 1980년 5월27일 오전 0시1분 이후로 한 것은 주영복 국방장관의 결정에 의한 것인.

    ▲1980년 5월25일 국방장관실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유병현 합참의장, 3군총장, 연합사부사령관 등이 참석한 간담회가 있었는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국방부장관의 요청으로 동간담회에 배석하였음(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국방회의에 배석한 것은 이 회의 한번 뿐이었음). 간담회에서는 육군본부가 수립한 상무충정작전이 시행되는 경우 북한의 군사동향 등 국내 ·외 관련 정세에 대한 검토를 하였음. 그러나 상무충정작전에 대한 논의는 없었음.

    21. 광주사태 기간 동안 광주 현지를 방문한 일이 있는지, 있다면 언제, 어떤 방법으로 광주에 갔으며, 현지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하였는지.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겸 보안사령관은 광주를 방문한 사실이 없음.

    22. 고소 · 고발인들은 12 · 12사건으로 군부를 장악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사전계획 하에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야기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광주사태의 진상」 참조.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미국의 저명한 정치연구기관인 해리티지 재단은 1985년 9·월16일 「남한의 광주사건 재조명」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였고, 1989년 5월호 노동해방문학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에서는 「광주사태」 당시의 이른바 「시민군」의 조직경위 및 활동상에 대하여 관련자의 상세한 발언이 수록되어 있음. 두 편의 논설은 「광주사태」의 진상파악에 참고되는 바 크므로 그 전문을 별첨함.

광주사태의 진실탐구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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