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5.18광주폭동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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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5일 십만 명이 운집했던 시위(일명 서울역 집회)를 보여주는 위 동영상 그림은 그날 유시민이 선동한 시위대에서 학생 폭도들이 지나가는 버스를 탈취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데 버스를 탈취하는 이 학생 폭도들의 정체를 잘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운전사를 강제로 하차시킨 후 그대로 방향을 급회전하면서 달려 순경 4명을 버스로 깔아뭉갰다.  그것이 우리가 바로 아래 동영상에서 보는 장면이다.



    광주의 518폭도들은 당시 방송이 편파 방송이라 광주의 방송국들을 불태웠다고 주장했지만, 상단의 "최규하 대통령 5월18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 뉴스를 들어보면 당시 뉴스는 상당히 온건한 표현을 썼던 듯하다.  시위대가 탈취한 버스에 경찰 몇명이 깔려죽었는데도, 국민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아니하고 "버스를 굴려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만 표현했다.  (그러나, 5월 16일자 경향신문은 순경 버스 압사 사건을 보도했음.)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과연 여러 사람이 사전에 아무 의견 없이 동시에 버스를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일 생각을 할 수 있었는가?  당시 증인들은 순경은 남대문 앞에서 한 줄로 얌전하게 서있었다고 한다.  김종환 내무장관 지시에 따라, 그날 경찰은 단지 시위대를 경호해 주는 역할만 했다.  그럼에도 학생 폭도 여럿이 동시에 버스에 올라타더니 여느 버스 운전기사가 흉내낼수 없는 급회전 주행으로 순경들을 깔아죽였다.  그리고, 그 범인들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정체는?


    이 사진의 보초병의 정체 또한 궁금하다.  이 사진을 보고 계엄군과 광주시민에 대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병사는 국군이 아니라 시민군이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트럭은 북한 인민무력부 직할부대인 특수전 대대가 다이너마이트 8톤을 전남도청에 운송하고 난 직후의 모습이다.  5월 19일 오후 3시경 북한군이 나주 경찰서를 습격하여 수천정의 무기를 탈취한 후 화순광업소에서 8톤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었는데, 이날 22일 그 다이너마이트들을 도청 지하실에 옮긴다음 뇌관을 장착하여 TNT 폭탄을 제조하였다.

    사실 그 무렵까지도 금남로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광주사태가 터진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타 도시에선 그 즈음에 뉴스로 알았지만 방송국들이 불타 뉴스를 보지 못하는 광주시민들은 오히려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보초병은 왜 출근 안하고 보초를 서고 있었을까?  도청 직원 증언에 따르면, 조선대 김종배가 5월 21일 도청 뒷문에서부터 제일 먼저 발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남대생들은 당시 무장을 거부하던 온건파였기에 이 보초병이 학생일 가능성은 적다.  장발을 하였으면서 군기가 들어가 있는 저 모습은 당시 장발을 하고 시민군 틈에 섞여 있었던 북한군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지게 한다.


   여기 이 사진은 하루전이었던 5월 21일 어떤 모습으로 도청을 습격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군인들이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죽었던 그 시간 다행히 도청은 중요 문서들을 모두 안전한 곳에 옮길 수 있었다.  군인들이 목숨을 바쳐 가면서 중요 문서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질 때까지 도청을 사수하였기에 5월 27일 광주가 도청을 되찾은 후에 신속하게 도시 생활과 전라도민 민생이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가능하였다.

   5월 21일 시민군은 도청 안의 국군을 몰살시키려 하였기에 과연 그들이 모두 광주시민들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게 한다.  아무리 공수부대라 해도 장갑차에 LMG-30으로 중무장한 시만군을 맨몸으로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두 대의 LMG-30 이 도청 안의 국군을 향해 정조준하는 것이 보이자, 국군은 공포탄으로 퇴로를 열면서 빠른 속도로 광주외곽으로 퇴각하여야 했었다.


    이 사진에서 도지사와 도청 직원의 도청 출입을 막기 위해 시민군이 몇겹으로 보초를 서고 있다.  창군 첫날 중무장하고 도청을 공격하던 시민군이 모두 장갑차며 LMG-30 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었던 것은 과연 그들이 모두 광주시민이었는지 의심이 가게 하며, 도청 점령 후에 초병들은 일사분란하게 자기 근무지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모습이 놀라움과 의심을 동시에 자아낸다.


   시민군 창군은 5월 21일 하였지만, 이미 수천 정의 총기와 수류탄 등을 5월 19일 나주경찰서에서 탈취해 왔다.  군중대회를 위해 도청 바깥에 있던 시민들이 바깥에서 본 해방구 사령부 모습과 안의 모습은 달랐다.  북한군이 TNT 등 무기 수송을 위해 사용하던 트럭들이 도청 안에 있으며, 5월 19일 나주 경찰서에서 탈취해 온 실탄들을 트럭에서 마당으로 沮値??내려놓은 후에 폭도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

   여태껏 광주사태는 무장폭도 옹호의 시각에서 주장되어 왔으나 이것은 대다수 한국인의 국민성이 상식을 크게 벗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책임의 소재를 누구에게 묻느냐의 문제가 있다.  나주경찰서 등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수류탄 등으로 중무장한 무장단체들이 장갑차를 몰며 LMG-30을 쏘며 도청을 공격하는데, 그 어느 도지사가 최소한 기밀 문서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광주향토사의 군인들이 최소한 언제까지나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광주가 광주사람이자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이었던 정웅소장에게 요청하였던 일이었기에 광주인끼리의 문제였는데, 어째서 그 5.18 사건과 전혀 관계없었던 인물에게 살인마 누명을 씌우는가?


   이 사진에서 우리는 윤상원이 5.18일 유포한 시위구호 "전두환 찢어 죽여라"를 본다.  그 전까지는 시위구호가 "최규하 하야" "신현확 퇴진"이었는데, 새로운 시위 구호가 등장하였으며, 이때 광주시민들은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었으나, 그가 누구였는지 전혀 몰랐다.  맨 위 동영상은 5월 19일 광주의 유지들이 광주사람 정웅 소장에게 전날의 과잉진압을 항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웅 소장은 안보임).  따라서 광주를 아는 이라면 그날의 시위 진압의 주체가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었음을 모를리 없었음에도, 더구나 아직 군인이 동원되기도 전에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시위 구호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만약 한국인 모두가 미개인들이 아니라면 이제라도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시위 구호의 타당성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한다.

    그 해 2월부터 김대중이 4월까지 군부 장성들을 찾아다니며 자기와 거래하자고 제의했었는데, 지혜로운 이학봉 중령이 정치인 김대중의 전두환 보안사령관 면담을 중간에서 막았다 (김대중과 이학봉의 증언 일치).  군부는 김영삼 편이 아니라 자기 편이라고 자랑하던 김대중이 동교동에서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거론한 때는 4월 30일 전두환 중앙정보부 서리 취임인사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날 전두환 중정 서리는 "어느 세력이든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대중이 "전두환 장군에게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같다"고 말하였다.  그 말이 침소붕대되어 불과 3주도 안되었던 5월 18일 김대중의 미등록 정당(일명 국민연합) 사무총장이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시위 구호를 제조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5.18 행사를 성대히 치루며 법석을 떨면서도 1980년 5월18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날 최규하 대통령께서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공영 방송에서조차 그때가 전두환 정권 시대였다고 왜곡하고,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으니 그토록 거짓말하는 국민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상단의 대한뉴스 동영상이 증언하듯이 분명히 최규하 대통령께서 5월18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최규하 대통령 시대에 대한 역사왜곡을 강요하는 주장은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사기꾼의 구호 옹호론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왜 4월 30일의 김대중의 말, "전두환 장군에게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같다"가 5월 18일에 그의 사무총장 윤상원에 의해 "전두환 찢어 죽여라"로 침소붕대되었을까?  첫째로, 김대중의 그 말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을 위한 견제가 있었다.  둘째로, 김대중이 이해찬을 시켜 거느리던 학생 운동권에 괴전화가 걸려온 5월 12일이 있었다.

   서울대총학생회장 심재철(沈在哲)씨의 광주특위 증언에 1980년 5월 12일에 "외부에서부터 군부 쿠데타 징조가 보인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일 후인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을 소집한 주영복(周永福) 장관은 이런 발언을 하였다. 『어제 밤11시에서 12시 사이에 청와대 대책회의 겸 정세보고 자리에서 각하가 「나이 60이고 살만큼 살았다. 이 시점에서 국가전복은 보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권이전의 문제입니다. 국가보위의 신성한 임무를 띤 군은 단안을 내려야 할 단계입니다. 여러분의 결의사항을 국무회의에 상정할 예정이며 정식결재를 받고 계엄군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지역비상계엄을 전국비상계엄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학생은 계엄해제를 요구하나 해제하면 국기가 흔들립니다』

   당시 양김씨, 특히 김대중의 재야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였으나,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는 양김씨가 국가에 대한 건의를 의회를 통하여 하지 아니하고, 학생들을 선동하고 동원하여 정치적 요구를 하는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 내각이 시위에 굴복하여 동시에 퇴진하는 것은 국가전복을 의미하였으므로 최규하 대통령은 국가가 전복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며 국가를 지킬 것인가를 선택하여야 했으니, 바로 그것이 5월18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였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하시자 김대중의 미등록 정당(국민연합) 사무총장 윤상원의 반응은 광주에서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시위구호를 제조해 유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두환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던 윤상원은 단지 김대중의 4월 30일의 말 "전두환 장군에게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같다"와 몇다리 건너 들은 서울 운동권의 5월 12일 군부 쿠데타설뿐이었다.

   당시 서울 운동권과 광주 운동권이 유언비어를 공유하는 채널은 전남대 운동권 사무실 전화와 광주의 좌익서점 녹두서점이었다.  5월 12일 서울대 운동권 심재철, 유시민, 한홍구 등에 걸려온 괴전화에 대하여 우리는 그 출처가 북한의 김용순 대남선전부장이 남파한 간첩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동교동의 자작극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심재철과 유시민에게 그 괴전화의 발신자가 간첩이었는 아니면 동교동 사람들이었는지를 물어본다.  그런데 제3의 가능성은 당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 당시 중정 총무국장이다.

   그런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게 하는 증언은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씨의 동생 김상집이 한다.  30대 중반쯤으로 느껴는 어느 남자가 군부대 이동및 계엄군 내부의 상황을 알려왔다:  "형님의 친구다. 지금 光州에 와있는 공수부대는 3.7.11공수이고, 20일 오후에는 미순양함이 釜山항에 도착할 것이다. 미순양함에서 헬기가 떠 光州 상공을 정찰비행할 것이다. 20일에는 전방부대가 光州인근으로 이동할 것이다. 군내부에서는 강경진압에 대한 찬반이 일고 있다."

   당시 녹두서점은 북한 사상서적을 전국 운동권에 보급하던 좌익서점이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정보를(미순양함 입항은 북한의 남침 징조를 알리는 뉴스였으므로 당시 정부가 민심 안정을 위해 극비로 분류) 녹두서점에 제공하였는가?  북한 정보부였는가?  남한 정보부였는가?  당시 김대중의 미등록 정당(국민연합) 사무총장은 이 서점의 공동운영자로서 광주 김대중 세력의 아지트로 삼았었다.  그리고,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이 당시 김대중의 심복이었으며,년 김대중 후보 선거위원장, 인수위 위원장, 국정원장 등 김대중 정부 요직을 거쳤다.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 세력을 지원한 데 대한 댓가였다면 녹두서점에 걸려온 괴전화의 발신자가 이종찬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누군가가 극비 정보를 녹두서점을 통해 윤상원에게 흘려주었다.  당시 김대중의 최측근이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과 윤상원이었으며, 암약하던 최측근으로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이 있었다. 이해찬 등은 아직 하위 서열이었으며, 그 서열은 김대중 정권 출범 때 그대로 나타난다.  1980년 5월 18일 김대중을 연행한 중정의 총무국장이 김대중 정부 인수위원장이었다.  그런데, 그날 5월 18일 녹두서점에 흘린 국가기밀은 북한 정보부에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김재규 부하였던 이종찬이 한때 김대중을 지지하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려고까지 하였었기에 김대중과 이종찬의 관계는 당시 좌익 핵심들간에는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윤상원은 녹두서점에 괴전화를 걸어 정보를 흘린 인물을 김대중 세력으로 여기고 행동하였다.  이 세가지를 소스를 가지고, 윤상원은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구호와 "미국이 광주의 독립을 위해 항공모함 두 대를 부산항에 입항시켰다"는 대자보를 제작하였다.  지금은 5.18측에서도 "미국이 광주의 독립을 위해 항공모함 두 대를 부산항에 입항시켰다"는 대자보는 유언비어였음을 인정한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윤상원의 구호 "전두환 찢어 죽여라"를 맹신하는 이들이 많으며, 마치 국민 모두가 유언비어교에 빠진 듯 그 유언비어를 맹신하고 있다.  광주사태는 5월 21일 무장폭도들에게 도청이 점령당하면서 빅뉴스가 되었지 그 이전에는 대부분의 국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5.18수사 결과로 판단하면 전두환 중정 서리도 5월 24일 이전에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은 그 사실을 중정 서리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5월 18일 녹두서점이 받은 괴전화의 발신자가 이종찬이었다면 이것은 그는 이미 5월 18일 광주사태 발발 사실을 알았으되 중정 서리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윤상원이 녹두서점 전화로 전국에 유포한 유언비어와 시위 현장 상황이 전혀 달랐다.  1980년 5월19일자 全南日報(지금의 光州日報) 사회면 머리기사로 작성된 18일 오전 全南大앞 충돌사건기사는 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그대로 설명한다.

[학생들이 그후 손에 돌멩이를 집어들고 정문으로 접근,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자,,,5월18일 아침은 여느 봄날의 휴일처럼 무등산에서 떠오른 봄날의 햇살이 光州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중략]
朝鮮大=정문에 공수부대 7-8명이 집총하고 출입을 금지시킴. 기자가 학 교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자 일체 안된다고 함...全南大에 주둔한 7공수여단 33대대(대대장. 權承萬 중령) 병력은 정후문의 출입을 일체 통제하고 있었다. 정문앞에는 [정부조치로 휴교령이 내렸으니 가정학습하기 바란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오전 9시가 넘어서면서 삼삼오오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중략]

全南大정문에서 약 30m 떨어진 용봉교를 사이에 두고 학생과 공수부대 원들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학생들이 다리 를 넘어서면서 공수부대원들이 나와 밀어내는 대치상황이 한참 계속됐다. 군의 첫경고 방송이 나오지만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높아져갔다. 일부학생들 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소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마이크를 들고 앞에 나섰다. [우리는 상부 지시로 全南大에 왔다.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졌다. 즉시 귀 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해산시키겠다] 장교의 말이 끝나자 정문양편으 로 공수부대원 4명씩이 2열 종대로 대열을 이뤘다. 학생들이 돌을 던졌으나 공수부대원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이것이 광주 기사가 기록한 사실이었음에도, 윤상원은 10시 30분 경 녹두서점의 金相集씨에게 전화가 걸어 "全大 정문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고 유언비어를 말하고 녹두서점 전화를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갔다. 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명으로 다음날인 5월 19일에 뿌린 삐라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는 유언비어 글귀가 가득한데, 윤상원이 그런 주장들을 늘어놓을 만한 정보 출처는 무엇이었는가?

   4월 30일 처음 김대중으로부터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자기 심복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이 전두환 서리에게 견제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동교동은 전두환 거세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5월 12일 심재철과 유시민 등 서울 운동권은 외부 괴전화를 그대로 믿고 "군부 쿠데타설"을 퍼뜨렸다.  맨위 동영상 처음 장면은 5월 15일의 서울 시위 장면인데,  "군부 쿠데타설" 유언비어에 선동된 시위였다.  그 유언비어를 광주의 윤상원이 몇 다리 건너 들었다.  그리고 그 서울발 유언비어에 근거하여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구호를 제작하였으며, 그 구호가 다시 서울운동권에게 전달되어 한홍구 등 유언비어 확성기들 입에서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가 제작되었다.

   이제, 심재철과 유시민과 한홍구 등은 5월 12일 받은 외부 괴전화가 간첩으로부터 온 전화였는지 동교동 자작극이었는지 확인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윤상원이 제조해낸 유언비어에 근거하여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를 제조한 것이 타당한 일이었는지 밝혀주어야 한다.  검찰이 전두환은 5.18사건과 관련이 없었음을 밝혔음에도 여전히 국민이 유언비어들을 맹신하고 있는데는 유언비어 교주 노릇을 하고 있는 이들의 책임도 크다.  이제는 광주학살 유언비어 원조가 살인마 누명을 벗겨 드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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