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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당시 공수부대의 충정작전 장면 동영상
 

아직 전경이 없었던 시대에 광주시의 요청으로 공수부대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 이틀 내지 나흘간 수행하였던 충정작전에 대하여 대검을 착검한 채 시위진압을 했다는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이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위 동영상은 그런 유언비어와 관련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위 동영상은 지난 7월 24일 KBS 영상물로서 분명 KBS 의도는 가장 과잉진압이라고 여겨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진압 장면에서도 대검착검은커녕 총조차 들고 있지 않다. 총은 뒤로 메었을뿐만 아니라, 총이 자꾸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끈으로 묶어 고정시켜야 했다.  이처럼 뒤로 멘 총은 무더운 날 무겁기만 할뿐 전혀 시위진압을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충정작전이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을 던져도 오와 열을 흐뜨리지 않고 행진하여 몸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작전을 말한다.  오늘날의 전경과 달시 당시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아무런 보호 장구가 없었다.  따라서 시위대가 던지는 돌이 얼굴에 맞아 안면이 함몰되는데도 방패는커녕 아무런 보호장구가 없었다.  부하들이 계속 부상을 입으니깐 진압봉이 지급되었다.  공수부대원들 손에 진압봉이 들려있으니 충정작전 중 과잉진압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겠으나 그럼에도 충정작전 때는 대검이 사용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영상 자료이다.

광주사태 당시 충정작전의 시작은 순경 구조 작전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는 광주향토사단에 순경 구조를 요청하게 된 것이었을까?  그 이유는 그날 6개 지역 파출서가 돌과 화염병에 의해 파괴된데 이어 순경 60여명이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되어 묶인채 각목으로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일보 민주항쟁 20주년 특집은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오후 4시40분 시위대 3백여명이 지산동파출소에 투석한 뒤 방화하고(전교 사 작전일지), 오후 5시에는 전경 40여명이 시위대에 붙들리기도 했다. 경 찰관이 시위대에 붙들린 것은 光州항쟁 기간동안 이때가 처음이다.

시위대는 전경을 붙잡아두고 경찰버스에 불을 지르는등 기세를 올렸다. 경찰력이 시위대에 밀리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전후해 동명동.지산동. 산수동파출소가 잇따라 피습당하고, 흥분한 시민들은 光州시장 관사에도 돌 을 던졌다. 시민들의 분노가 어울린 적극적인 공세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全南大 총학생회 홍보부차장이었던 李광호씨(당시 21세)의 증언.

농장다리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40여명의 전경을 인질로 잡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등을 빼앗은후 그들을 앞세우고 약1km 가량 떨어진 장동로터리로 갔다.

이들을 넘겨주고 대신 연행학생들을 석방시켜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로터리에 도착했을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우리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 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인질을 놓치고 말 았다 (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편, 光州5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서 발췌) >

훗날 1991년에 보상금 2억여원을 수령한 뒤 곧 바로 월북하였던 대표적인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윤기권은 그날 자신도 순경 15명을 인질로 납치했음을 1989년 이렇게 증언한다:  "그곳에서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천변을 통해 동명동에 있는 동산파출소로 쳐들어가 파출소를 쳐부수고 최규하 대통령 사진을 떼어낸 다음 짓밟아버렸다. 파출소 안에서 근무하던 경찰 둘은 우리들의 기세에 눌려 뒷문으로 도망가버렸다. 4시경 우리는 다시 법원 쪽으로 갔다. 산수동으로 가는 도로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파출소를 깨부순 기세로 우리는 쫓아가 돌멩이와 각목으로 마구 두들겼다. 그안에 타고 있던 10∼15명의 경찰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 출처 )

이렇게 순경 60여명이 난동자들에게 인질로 납치되어 억류되어 있었기에 광주시는 광주향토사단에 순경 구조 요청을 하게 되었던 것이요, 광주향토사단(31사) 사단장 정웅 소장이 지역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그날 오후 4시 40분에 7공수 33대대와 35대대(전북 금마 병력)에 충정작전 명령을 내렸다.  난동자들에게 인질로 납치되어 꽁꽁 묶인채 끌려다니고 있던 순경 60명을 구출해 내는 작전은 신속한 행동을 요하였으나, 위의 영상물이 보여주듯이 그 작전을 수행하였을 때 대검을 착검하거나 사용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항간의 악의적 유언비어와 달리 공수부대는 충정작전중 착검하지 않았다.



열띤 토론마당


[동영상] 광주사태 일으키려 1980년 3월에 침투한 무장간첩들

518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윤기권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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