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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의 외조부는 김대중의 선거운동원 1호?



문근영이 아직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1997년 문근영의 부모는 김대중이 당선되면 연예인이 되게 해주겠다고 말하였으며, 연예인 지망생이 무수히 많은 이 나라에서 문근영은 김대중이 당선되자마자 신델렐라처럼 등장하였다.  김대중이 당선되면 연예인이 되게 해주겠다"는 문근영 부모의 이 말은 김대중과 그 집안과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바, 언론은 이미 그 연결고리가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임을 밝혔다. 좌익 언론이 지리산 빨치산 출신 류락진을 통일운동가라고 불렀을 때 그가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이란 간첩단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바, 거물 간첩 김용규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 72쪽에서 김용규는 통혁당이란 간첩단의 의무가 바로 1967년에 목포에서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이 시사하는 바는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은 김대중의 선거운동원 원조였으며, 김일성의 계획대로 4년 후에 김대중은 대선 후보가 되었으며, 문근영의 외조부를 포함한 간첩단이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국회에 보낸지 30년만인 1997년 드디어 김대중이 청와대에 입성하였던 것이다.

김대중이 목포 출신이었으며, 광주사태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목포 출신 김대중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음에도 대다수의 국민이 광주를 김대중의 고향으로 착각하고 있음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가히 자생 간첩이라 부를 만큼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며 무장봉기를 통한 노동자 계급혁명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윤상원이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으로서 광주의 녹두서점에 아지트를 차려놓고 있었던 것뿐이었지,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김대중을 광주사람으로 여기기는커녕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상한 교육과 언론 플레이의 영향으로 오늘날 광주시민들 중에도 김대중이 광주 출신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본다. 이렇듯, 남한 사람들도 한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고향이 광주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때에 때로 탈북자들의 증언이 우리에게 객관적인 사실들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어째서 김대중 정권이 간첩을 안잡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탈북자들의 증언이 그 이유를 말해 준다.

김대중은 신안군 출신으로 신안군과 무안군이 목포 지역이며, 김대중은 일제시대 말기에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좌익들 틈에 끼어 기반을 다지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거물간첩 김용규가 대남공작 비화 [소리 없는 전쟁]의 72쪽에서 간첩들로 이루어진 통혁당이 1967년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고 증언하였을 때 대다수의 독자들은 무심코 넘겼었다. 간첩단이 1960년대 중반에 남한에 통혁당이란 당을 조직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김용규의 증언 내용을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이 바로 이 통혁당 출신이었기에 통일운동가였다는 최근의 좌익 언론의 논리가 우리로 그 사건을 실감케 했으며, 김용규의 증언을 재음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탈북자의 증언 등 아래의 동영상들은 광주사태는 어느 날 갑자기 난데 없이 터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길게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가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고,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김일성과 김대중이 어떤 합작을 하였을지를 조금이나마 짐작케 해준다.



바로 위의 동영상에서 우리는 탈북자 이수근씨가 기자회견하는 모습을 본다. 만약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이 김일성 지령에 따라 활동했던 김대중의 선거운동원 1호였다면, 이수근씨는 우리가 기억하는 탈북자 1호였다. 언제부터인가 탈북자가 내려와도 더 이상 기자회견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지금은 탈북자의 수가 많으니 탈북자가 와도 더 이상 언론의 조명을 받지도 못하며 신문기사로조차 보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수근씨가 탈북하였을 때는 그것이 대사건이었으며, 가장 큰 뉴스거리였다. 아직 TV가 한국에 출현한지 얼마 안되어 희귀품 중의 희귀품이었던 때였지만 사람들은 이수근씨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직도 남한 국민 대다수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그해 1967년 4월에 이미 그 기자회견에서 밝혀주었다.

김일성의 전략은 연방제 적화통일 동조 세력을 남한에 심어두고 육성하는 것이었다. 1975년 월남도 남남분열로 패망하였으며, 친북세력, 혹은 연방제 적화통일 동조 세력을 심어 남남분열을 시키려던 김일성의 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위해 이수근씨는 "하부 구조"라는 표현을, 김용규는 "소리 없는 전쟁"이란 표현을 쓴다. 남한에서도 북파 간첩을 보내었겠지만 북한에 하부 구조를 만들어 놓고 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 편에서는 북한에 류락진과 김대중의 역할을 해 줄 하부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그런 시도도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하부 구조라는 남한 내의 친북세력을 지원하며, 그런 북한의 전략이 김용규가 말하는  소리 없는 전쟁"이다. 탈북 군인들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의 침투 세력이 있었다고 증언하는바, 그 방법은 광주사태 일어나기 12년 전에 쓰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동조세력이 있는 곳에서 도시 게릴라 방법을 지원하였다는 의미이다.

탈북군인들은 무기 탈취는 광주시민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복장을 위장한 북한군의 지원이 있었던 것이라고 증언한다. 지금 그리스에서도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광주사태와 다른가? 감히 시민이 군용차량, 총기, 수류탄, 장갑차 등을 탈취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데서 광주사태와 다르다. 하물며 비상계엄 하의 1980년 봄에 무기 탈취를 하는 것이 쉬웠을 리가 있겠는가? 광주 외곽 30여곳의 무기고 위치를 상세히 알고 있던 자들이 누구였으며, 어떻게 동시다발적으로 군용차량으로 무기고를 받아 문을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5월 19일부터 시작된 무기 탈취 이전에 군용차량 탈취가 있었다. 5.18측은 광주시민 단독으로 군용차량들과 군사무기들을 탈취했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일반 시민 단독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을는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우므로 탈북군인들의 증언쪽에 더 신빙성이 있다.

어째서 북한당국은 지금까지도 광주인민봉기에 상당한 의의를 두고 있는가? 그것은 광주사태가 그들이 남한에 심어놓은 지하당에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지하당 활동은 1960년대에도, 1970년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로 "민주화"라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 윤상원 등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속에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겉에 민주투사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 간판으로 외신기자들의 눈을 깜짝같이 속일 수 있었으며, "민주화"라는 명분을 갖게 되자 1980년 이후로는 더 이상 지하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민주화"라는 명분을 내걸면 얼마든지 국민의 이목을 속이며 여론을 조작할 수 있었고, 또 "민주화"라는 명분만 내세우면 좌익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저서 72쪽에서 김용규는 그 선거전에서 "통혁당 조직원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역전, 터미널, 시장터 할 것 없이 찾아다니며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목포가 죽느냐 사느냐 사활이 걸려있는 선거다. 목포시를 살리고 내가 살기위해서는 공화당을 낙선시켜야 한다(낙선운동의 시조)’고 목이 터져라고 외쳤다”고 증언하는바, 아래 동영상을 보면 놀랍게도 실제로 1967년 6월 8일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있었다. 아래 동영상에서 김종필씨 등이 유세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아래 동영상에서는 들을 수 없지만 1967년 6월4일 오후 2시에 김대중은 목포역전 광장에서 이렇게 연설하면서 선거유세를 하였다:  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연방제 적화통일의 수순 중 하나가 바로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이었다. 그리고, 6.15남북공동선언은 북한이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북한 핵무기 개발자금으로 8억 달러를 불법송금한 정권이 어느 정권이었던가? 바로 김대중 정권이었다. 그리고, 퇴임 이후에도 지금껏 후임 대통령들에게 6.15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누구인가? 바로 김대중이다. 김정일의 핵무기 장사는 "통미봉남"을 노리고 있다.  통미봉남"이란 북한이 미국과 수교하면서 남한을 봉쇄하겠다는 말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중동에 팔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은 북한과 수교하고 한미동맹을 끊으라고 것이 북한이 내미는 카드이며, 한미동맹만 해체시키면 경제적으로 봉쇄된 남한은 자동적으로 북한의 손아귀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 적화통일론자들의 셈법이다. 그런데, 지금 김대중이 미국에도 북한의 "통미봉남" 요구를 들어주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북한에서는 대북 지원받을 것은 다 받되 목표는 하나인바, 통미봉남 전략이 그들의 목표이다. 김정일의 핵무기 거래 조건은 한미동맹 해체이므로 6자 회담의 난항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며, 미국이 북한의 요구에 어떻게 응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는 시기이다. 북한 주민이 가난하다. 그러나 북한당국의 목표는 동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한을 삼키는 것이며, 북핵거래 카드는 북한이 쥐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셈법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탈북자 단체가 북한에 풍선으로 삐라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사상전에서 북의 공격만 받을 것이 아니라, 이편에서 북한 주민의 의식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를 해야 하기에 나온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지금 좌익 단체들이 막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동영상은 북한이 어떻게 1960년대부터 좌익 단체들에 파고들어 의식화 공작을 했었는지를 보여주는 바, 이수근씨의 증언과 위 동영상 뉴스는 훗날 송두율 교수 사건 등으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5.18측은 그때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기 위해 시위를 시작했었던 것이라고 변명한다. 즉, 당시에 비상계엄해제 요구라는 시위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주사태 때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했었다는 탈북군인들의 증언에 대하여는 북한군 침투는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두가지 주장을 동시에 하는 것은 모순이다. 교통안전수칙을 무시하라는 요구와 교통사고의 위험은 전혀 없다는 주장이 양립할 수 있는가? 교통사고를 당해 본 사람이라면 교통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을 통과할 때는 더욱더 조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이 1968년 1월 북한 무장간첩들이 청와대까지 침투한 사건을 겪었던 1980년 봄 최규하 대통령의 입장이었다. 위 뉴스를 보면 국민의 걱정을 배려하여 김신조 일당이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아무런 멘트가 없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도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문턱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면, 박 대통령 사후에 김일성이 그 호기를 모른체 할리 없었고, 그래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였든, 자민당 총재였든, 한나라당 총재였든 달라진 것은 그의 소속 정당 간판이었지 김영삼이란 인물 자체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류락진이 1950년대의 지리산 빨치산이었든, 1960년대 통혁당 사건 때의 류락진이었든, 1990년 구국전위 사건의 류락진이었든, 2000년대 초의 범민련 고문이었든 그의 소속 단체명이 바뀌었던 것뿐이지 류락진이란 인물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중반에 공산주의를 선택한 류락진은 21세기에 살면서도 끝까지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류락진의 통혁당 사건과 김대중의 내란(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 일으키려다 발생한 광주사태) 중간에 인혁당 사건과 남민전 사건이 있었다. 운동권은 이런 사건들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방법을 사용하여 연방제 적화통일 도모하려는 세력은 분명히 실제로 있었으며, 그 명칭이 1970년대에 인혁당으로, 그리고 그후에 남민전으로 바뀌었을 뿐 그 뿌리가 1960년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통혁당 잔당들이었던 것이다.

좌파 언론과 좌파 교육의 영향으로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이 12.12사태를 실제 사건과 전혀 딴판으로 이해하고 있다. 좌파 교과서대로라면 12.12사태로 김대중이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12.12사태가 있었기에 김대중이 사면복권되고 다시 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12.12사태가 없었다면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의지대로 김대중은 영영 정계에 복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김대중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려 했었던 이유가 훗날의 거물간첩 김용규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아래는 "김대중은 전향하지 않은 공산당"이라고 못박아 말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취재한 바 있는 손충무 기자가 그의 저서 '김대중 x-파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김대중은
<<북괴군이 그의 고향인 목포를 점령하자 활약하다가 6.25전에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은 사람들의 고발로 내무서에 구금되었으나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는 바람에 자유의 몸이 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사업을 했지만 실패, 다시 1954년경 강원도 인제로 갔다. 인제는 당시 행정력이 가장 취약한 최일선 수복지구였다. 그는 그곳에서 그 특유의 조직과 선전술을 이용하여 1961년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었으나 5.16으로 의원선서를 못했다.

내가 특히 놀란 것은 1960년대에는 불순인물과 은밀히 만난 사실이 있었다는 것 등에 관한 기록이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건대 북쪽의 공산집단과 대결하고 있는 우리의 형편에서는 그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한다는 것은 문제 발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나는 또 일본의 반한파 사회주의자 정객인 우스노미야 도쿠마가 1972년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하고 그 회담 기록을 일보에서 출판한 것을 읽어본 일이 있었다(정승화 씨의 이 부분은 잘못된 것이다.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과 김일성이 만나 김대중 구출문제를 논의한 것은 1974년이다. 필자 주).

그 책에는 김일성이 우스노미야 도쿠마에게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남북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트일 수 있을 것이라며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대목도 있었다.

나는 김대중 씨를 놓고 여러 각도로 분석하여 나름대로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얻게 되었다. 김대중 씨는 과거 젊은 시절이었을 때라 하더라도 공산주의와 관계를 맺은 일이 있다. 그리고 현재도 내가 보기에는 언행 등 그가 취하는 수단과 방법 등에서 과히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성장과정 등을 미루어볼 때 석연치 못한 점이 있다. 따라서 북쪽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으로 보아 국군을 지휘하는 위치를 차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서슬퍼런 정승화 장군 치하의 계엄정국에서는 김대중은 감히 정계복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는데, 12.12사태가 일어났기에 김영삼씨와 더불어 나란히 대선후보로서 정계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12사태 두달 후인 2월에 김대중의 사면복권 절차가 완료되어 비로서 정계복귀를 할 수 있었으니, 12.12사태가 김대중의 정치 생명을 위해서는 천운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은 "내가 특히 놀란 것은 1960년대에는 불순인물과 은밀히 만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음에 주목해 보라. 1960년대의 불순인물이라면, 훗날 거물간첩 김용규가 증언하는 통혁당의 인물이요, 통혁당의 인물이라면 류락진--요즘 좌익 언론이 통혁당 간첩사건 당사자였기에 통일운동가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류락진이 아닌가!

이렇듯 통혁당과 김대중의 관계에 대한 훗날의 김용규의 증언은 1979년 11월경 정승화가 넌지시 언급했던 말로 재확인된다. 그렇다면, 통혁당 간첩들은 어떤 방법으로 김대중의 선거운동을 지원했었을까? 거기까지 자세히 알기는 어려우나 훗날 김대중이 선동하였던 시위의 특징이 흑색선전이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지난 여름 광우사태 때 폭도들의 구호가 "이명박 물러가라"였는데, 아무개 물러가라는 김대중이 선동하는 시위 구호의 전유물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시위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였으며,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일정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는 5월 19일부터 외치도록 되어있었다. 5월 15일 서울역 집회 때도 잠깐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가 나오긴 했지만, 본래 일정은 5월 19일을 기하여 전국 대학교 벽보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 대한 흑색선전 벽보, 즉,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는 대자보를 붙임과 동시에 외치도록 되어있었다.

좌파의 역사왜곡 교과서대로라면 12.12사태에 대한 저항권으로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5.18봉기군 대다수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12.12사태라는 용어는 7년 반 후인 1987년 12월부터 등장한 용어였다. 12.12 사태는 만약 전두환이 1981년 5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하였거나 장기집권하였다면 전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할 사건이었다. 광우사태 때의 "이명박 물러가라" 구호는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의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는 사실 시위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구호였다.  전두환"이란 이름도 들어본 적도 없으며, 얼굴도 모르며,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혀 몰랐으면서 외친 구호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김대중의 흑색선전 버릇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19데모 직후 1960년 7월29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하여, 투표함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당선된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다. 자기의 부하를 시켜 자기의 선거참모를 구타해놓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다. 자기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시켜 상대방이 고무신을 뿌렸다고 역선전을 했다.

1972년 총선 때 김대중의 신민당 헤게모니 경쟁자는 신민당 당수 유진산씨였다. 당시 유진산 주변에는 3억원을 받고 거래 흥정을 해서 지역구를 팔아 먹었다는 악소문을 누군가가 흘리고 다녔다. 유진산의 등록후보를 저지하기 위해 50명의 청년당원을 동원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겨우 접수를 마감하고, 그 후, 유진산의 집에는 '돈 받고 당을 팔아 먹은 유진산이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300여명의 청년들이 급기야 집안으로 난입하고, 당수실도 집단 폭력의 장으로 난동을 부렸다. 이 사건은 당시 지역구 출마계획을 가진 김여산과 김대중의 비서 이윤수가 청년을 지휘 하였던 일로서, 김대중은 동교동에서 김옥두 비서로 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유진산 물러가라" 구호에 견디지 못해 유진산씨가 당수 직을 양일동에게로 위임하자, 양일동마저 폭행을 하며 신민당 탈당계를 요구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정계복귀는 보안사령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런 도움을 주었던 전두환이 김대중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그런데, 어째서 김대중이 배은망덕하게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게 하였을까? 바로 이 질문이 김대중의 전국연합 과격파가 추진하고 있었던 무장봉기, 즉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방법, 혹은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썼던 도시 게릴라 방법을 쓰는 무장봉기 계획에 대한 김대중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의 질문과 맞물려 있다. 보안사령관을 물러나라고 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만약 있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좌익의 무장봉기 장애물이 반공군인 전두환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폭동 진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지만, 김대중과 그의 국민연합 과격파들 편에서는 반공군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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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의 가족사에 얽힌 김대중 그룹의 정체성

문근영 외조부 류낙진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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