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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점화원인을 정동영에게 묻는다



사진설명: 1988년 12월 7일 광주청문회 때 정호영 증인의 날카로운 진실 앞에서 공화당 질문인 옥만호 의원(왼쪽)의 궤변 말문이 막히고 있다.



광주사태 때 공수부대 동원명령자는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었다는 위의 증언 잘 들려요?

정동영이 공인으로서 그간 광주사태의 진실을 왜곡하는 발언을 누차하였기에 이제 우리는 정동영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동영은 기자 출신이라는 자가 광주일보 기사의 보도 내용도 독해할 줄 모르는가? 김대중 정권 하에서 광주사태를 재조명하여 취재하던 광주일보는
http://www.kwangju.co.kr/518/025.asp
에서 이렇게 보도하였다:

<< 이대목에서 鄭雄 31사단장에게 곤혹스런 사실이 나타난다.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을 끝까지 반대한 의로운 군인이란 칭호로 국회의원까지 당선됐던 鄭31사단장은 기실 5월 18일 오전에는 계엄사의 명령계통에 따라 충실히 공 수부대의 錦南로 투입을 지휘한 장본인인 것으로 검찰은 밝히고 있다.

수사기록에 의하면 鄭雄31사단장은 尹전교사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오후 2시 5분 500MD헬기로 全南大와 朝鮮大를 방문, 주둔중이던 7공수 33.35대 대장에게 지금 시내 시위가 악화돼 경찰이 수세에 몰리고 있으니 오후 4시 를 기해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도 청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한 것으로 되어있다.

鄭 31사단장은 이 명령을 내려놓고 부대로 돌아와 尹전교사 사령관에게 오후 4시 군을 투입하겠다고 보고했다. >>

즉, 광주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과 5.18 검찰이 발표한 사실과 광주일보가 기사로 낸 사실이 일치하는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시위대가 광주 순경 40명을 묶어놓고 각목으로 구타한 사건이 있었으며, 파출서들이 파괴되고 광주경찰이 궤멸된 그날 광주시장과 광주경찰서장이 광주향토사단장 정웅 소장에게 진압 도움을 요청하였고, 정웅 소장은 그의 독단적인 판단과 명령으로 광주향토사단, 즉 31사에 배속된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하였던 것이다.

정동영이 아래의 의혹에 대하여 논리적인 답변을 해 주지 못하는 한 국민은 광주사태를 폭동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정동영은 광주사태 당시 MBC 앵커였다면서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5월 16일에 김대중 홍위병들이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총학생회장연석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그 날 연속회의의 목적은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내란을 준비하기 위한 것, 즉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을 무력으로 하야시키고 자기가 스스로 대통령되기 위한 거사 준비였다는 사실을 몰랐는가? 본래 김대중은 광주사태를 전국적으로 일으키려 하였기에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국 각 대학교에 시위선동 대자보가 나붙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정동영이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릇 모든 점화에는 점화 원인이 있다. 2003년 1월 대구지하철 사고 때도 점화 원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광주사태 점화 원인에 대하여는 정동영이 이렇듯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점화원인의 진실을 말하지 않고 광주사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정동영은 생각하는가?

민주정치에서 정권은 선거를 계승된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선거를 거치지 않고 민중봉기, 즉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는데, 정동영 눈에는 그것이 민주화 운동으로 보이는가? 그리고, 그날 5월 16일 전국총학생회장연석회의에 참석하였던 대학생들 몇명이 김대중의 국가전복 음모를 당국에 알렸을 때 당국이 김대중을 연행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당시 중앙정보부 최고위 실무자는 당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 총무국장이었음에도 이종찬씨가 김대중씨 연행을 지휘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더욱이 김대중의 내란 음모 증거를 소멸시키는 등 김대중에게 유리한 일을 당시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이 행하였기에 훗날 김대중이 집권하자마자 이종찬씨를 국정원장에 임명하였던 것이 아니엇던가?

정동영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는 자가 해방구의 의미도 모르는가? 동북아 공산주의 혁명사에서 해방구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는 사실도 모르는가? 김대중의 거사 예정일이었던 바로 그날 5월 22일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동북아 역사에서 해방구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설치되었다. 그렇다면, 광주에 설치된 해방구의 의미와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정동영은 국민에게 말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정말로 그가 역사 공부를 하였다면 해방구에 대한 역사학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동영은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 운동권 동지로서 바라보는가? 노동 시인 박노해 역시 윤상원을 동지로 바라보며, 그의 저서 "윤상원 평저"(
http://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nnew=2&y_number=246
)에서 윤상원의 목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이론 학습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혁명가의 학습은 구체적 목적성에 기초하여 당면 실천과의 정확한 역량 배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혁명 운동가의 목적은 기존의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을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재조직 화함으로써 진정한 인간 해방을 이룩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관심과 노력과 행동은 '투쟁'에 있다. 투쟁을 잘하기 위한 조직화, 투쟁을 잘하기 위한 사상 투쟁으로 그의 구체적 실천 행위는 조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 운동가는 단 한시도 당면한 '투쟁 전선'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설사 그 시대가 혁명운동의 '선전 단계' 일지라도, 그가 설정한 긴급한 과제가 '이론 준비' 일지라도, 그가 맡은 임무가 '조직 재건' 일지라도 그의 시선은 당면한 투쟁 전선으로 모두 어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론 학습은 그 이론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인, 생생한 현실 계급투쟁으로부터 무게중심을 제공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객관 현실에서 진행 중인 계급투쟁을 막연히 밀쳐둔 채 '단계적으로' 우선 학습부터 하고 보자고 할 때, 그 학습은 무게중심을 상실하고 동력이 끊어진 채 캄캄한 불가지론과 관념의 안개 바다 속을 떠돌다 좌초하는 무력한 배가되고 말 것이다. 혁명 운동가는 현실 투쟁 속에서 부딪치는 난관을 이론적인 문제의식으로 끌어올리고 과학적 이론으로 해명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선은 항상 투쟁 전선에 못박혀 있고, 그의 촉각은 계급투쟁의 한 중심부에 뻗쳐 있기에, 그의 이론 학습과 연구 작업은 살아 펄떡이는 현실성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동일한 전선 위의 또 하나의 투쟁으로 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만약 정동영이 역사학을 진지하게 배웠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공산화인지 민주화인지조차 식별할 판단력이 없는가? 지금 국민이 정동영에게 바로 그 점을 묻고 있는 것이다.

http://cafe.daum.net/issue21

광주사태 증언자료
http://cafe.daum.net/518cafe


참고하세요


아래 신문기사가 광주사태의 전후관계를 증언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은 선거로 승계된다. 그런데, 신민당 후보단일화에서 김영삼씨에 비해 열세였던 김대중은 선거를 방해하고 민중봉기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의 선거법 직선제 개헌안을 반대함과 동시에 1980년 5월 초에 최규하 대통령 하야 요구를 하는 시위를 너무 선동하여
정국이 아주 혼란스러웠었다.

난동자들이 5월 19일 나주경찰서에서 수천 정의 무기를 탈취하고, 5월 20일 신현확 총리 내각이 총사퇴를 한데 이어 5월 21일 일간지에는 최규하 대통령께서도 곧 하야를 단안하신다는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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