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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왜 증인에게 명패를 던졌는가?

안기부 직원 이화춘이가 노무현에 대한 회고 “광주항쟁 테이프를 보여주더군요. 일어서려는데 노변호사가 소설가 황석영씨가 집필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란 광주항쟁 기록집을 주더라고요.”


위의 오디오는 1988년12월 7일 문동환 사기꾼의 사회로 진행되었던 광주 청문회 오디오인데 잘 들려요? 허위 주장을 큰 목소리로 우기는 김대중의 평민당의 어거지를 듣고 무엇을 느끼시는지요?

문민독재자 김영삼씨는 광주사태와 관련시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체포하고 구금하여 사형 언도까지 받게 하였는데, 사실 광주사태는 김영삼씨의 정치하는 방식 때문에 일어났다. 어디서 광주사태는 출발하였는가? 그 해 2월 김영삼씨의 신민당과 김대중의 집단과의 합당에서 그 불씨가 생겼다. 양김씨가 합당한 것은 동상 이몽의 합당이었기에 두 달도 채 못되어 김영삼씨 지지자들과 김대중 지지자들간에 각목 들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1980년 봄에 선거철이 시작되었는데, 왜 양김씨가 싸웠는가? 그것은 후보 단일화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당시 대선은 자칭 민주화 세력과 김종필씨의 대결이었기에 단연 자칭 민주화 세력이 우세하였다. 그래서 김영삼씨의 합당 논리는 자칭 민주화 세력의 표가 갈라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고, 1970년대에 조총련 하수인으로서 간첩 활동하였던 것이 경력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김대중은 신민당에 입당하는 것이 자칭 민주 투사 명함을 유권자들에게 내미는데 유리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씨 좋은 일만 해 줄 김대중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도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고 우겼다. 그래서 서로 자기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고 하니깐 4월에 각목 들고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신민당 후보 단일화에서는 자기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선거를 방해하려고 깽판을 놓기 시작하였다. 당시 김대중 지지 세력이란 이해찬을 수장으로 하던 대학가의 김대중 홍위병 조직이었으며, 노동계에도 지지 세력을 넓히기 위해 윤상원을 껴안았다. 그리고 김대중 못지 않게 정치 지망생이었던 윤상원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과격한 시위는 5월 20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대통령으로 세우기 위한 시위였다. 그래서 그것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정권을 선거로 승계한다. 그런데, 김대중은 강압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정권을 잡으려 하였다. 그때 386 미개인들은 당시 시위 구호의 의미를 알고 외쳤는지 모르나, 당시 시위 구호 "개헌 반대"는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5공화국 대통령 선출을 위해 당시 "간선제"를 최규하 대통령이 "직선제"로 개정하려 했는데, 김대중이 훼방놓고 방해하였다.

5월 20일 예정되었던 거사일을 5월 22일로 연기하고 김대중 홍위병들은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강당에서 "전국대학생총학생회장연석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던 대학생들 몇명이 당국에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집권하려고 하는 거사 계획을 알려주었다. 당시 과격시위할 때마다 김대중 홍위병들은 최규하 대통령이 5월 19일까지 하야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네는 책임지지 못한다고 정부를 위협했었는데, 그 위협의 내용이 그 날 5월 16일 분명하여졌으므로 당시 석유 외교차 중동 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그날로 순방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귀국하여 5.17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선포하였다.

이런 점에서 고건 당시 청와대정무수석의 판단력은 의심된다.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주청하였던 자는 고건이었다. 그는 5월 10일경 최규하 대통령이 석유 외교차 중동으로 출발하시던 날 최 대통령께 주청하기를 지금 시위를 잠재우는 방법은 시위대의 요구대로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 빨리 결단하여야 하신다고 하며 하야를 재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홍위병들의 고민은 또 다른데 있었다. 아무리 선동하여도 시위가 서울과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런 미미한 열기로는 민중봉기로 김대중을 대통령 자리에 앉히기에 세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더 이상 5.18 연구소의 연구는 무의미하다. 그들이 증언 자료를 찾으면 찾을 수록 윤상원이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였으며, 폭동을 일으키려 하였으며, 군경과 민간인 사이에 유혈 충동이 일어나도록 유도하였었다는 증언밖에 없기 때문이다. 5월 22일 도청 점거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었으며, 5월 22일 도청 점거는 그 날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들이 광주사태를 일으킨 것은 전혀 군부에 대한 대항이 아니라, 정치적 헤게모니 경쟁에서 김영삼 지지자들에 대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후보 단일화에서 김대중이 유리하였더라면 김대중은 광주사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5월 22일 거사일은 점점 가까워는데 "직선제 반대" 시위 열기는 점점 식어가자 김대중은 극약 처방을 쓰는데, 바로 그것이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장군의 이원 집정설" 루머였다. 아직 국민은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보지 못하였던 때라 국민을 상대로 그런 사기극을 벌이기는 힘들었으나, 대학가 대자보 몇장이면 386미개인들을 충분히 현혹할 수 있었다.

사진 설명: 한 무식한 사기꾼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을 가로 막으며 "발포 쟁점부터 밝혀"라고 반말로 고함지르고 있다.


사진 설명: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 던지기 일보 직전의 노무현.  노무현의 손끝이 슬그머니 명패로 향하고 있다.


김영삼씨와 헤게모니 경쟁을 하던 김대중이 4월까지는 군부는 자기 편이라고 떠들며 다녔었다. 그런데, 5월 초에 갑자기 최규하-전두환 이원 집정설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는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김대중의 서울발 루머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조직 호남 총책 윤상원의 광주발 루머의 시기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윤상원은 김대중이 운동권에 시위 선동용으로 내려보낸 루머에 자기 픽션 소설을 가미하였다. 그는 전두환 장군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광주에 퍼뜨렸으며, 전남대에서는 그 말에 속은 학생들이 많았던 듯하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4시 30분에 광주 사람 정웅 소장이 광주향토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시위 진압 명령을 내렸던 것은 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며, 그날 광주 경찰과 전남 치안본부가 파출서를 파괴하고 순경들을 묶어놓고 각목으로 때리는 폭력시위에 궤멸됨에 따라 광주향토사단에 요청하여 정웅 소장이 스스로 판단하여 시위 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이렇듯, 광주사태는 폭동을 일으킨 쪽도 광주 시위대였으며, 광주 군부에 폭동 진압을 요청한 쪽도 광주시 당국이었으며,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시위 진압을 하기로 결정한 쪽도 광주 군부였다. 그런데, 왜 광주사태가 일어난 사실조차 몰랐던 분들에게 진압 책임을 묻는가?

전두환 광주학살 루머는 공수부대가 시위 진압에 나서기 전에 이미 윤상원이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윤상원은 시위를 선동하기 위해 그런 루머를 광주 전 지역에 퍼뜨렸으며, 당시 북한 서적 밀수 전문 서점이었던 녹두서점 전화로 전국 운동권에 그런 루머를 퍼뜨렸는데, 아마 그것은 본래 5월 22일로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당시 시위의 목표가 전국적 민중봉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5월 19일 이미 총기 무장한 광주 시민군이 실제로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었기에 당시 광주 외곽 봉쇄는 불가피하였었다.

1996년 1월에 5.18 검찰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5.18 사건과 털끝만치의 관련도 없었다고 발표하였으며, 현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조사위도 전국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져도 전두환이 5.18 사건과 털끝만치의 관련이라도 있었다는 근거를 찾지 못하였으며, 광주사태 당시 한국군 동태를 일거수 일투족 기록한 미정보국 문서도 운동권 주장과는 상반된 증거들을 제시할 뿐이다. 이렇듯 진실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에 있어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5.18 사건과 털끝만치의 관련도 없었다.

그렇다면, 윤상원이 퍼뜨린 루머에 대한 신빙성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윤상원은 다음 둘 중 하나이다. 그는 미국 CIA보다도 더 뛰어난 정보망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윤상원은 김대업을 뺨치는 사기꾼이었다. 분명, 공수부대 지휘는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하였다. 그리고, 광주사태 일으키기 훨씬 전부터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였으며, 탄약고와 장갑차와 수류탄이 보관되어 있는 위치들을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윤상원이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은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그러면, 어떡해 그의 눈에는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전두환 장군으로 보였다는 말인가?

광주사람 정웅 소장도 군인이다. 그는 군인다운 군인이 아니었다고 우기는 것이 광주인이 아니다. 그도 군인이었을진대, 그리고 장성들의 세계에서는 서열이 군번순으로 정해질진대, 정웅 소장이 지휘 계통상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자기보다 군번이 6년 느린 하급 장교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런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윤상원이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전두환 광주학살" 루머를 퍼뜨렸을 때 그의 말은 사실이든가 거짓말이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그것은 그가 미국 CIA를 능가하는 정보 보유자였음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윤상원 측에서, 518측에서도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하였는지 출처를 밝혀주면 되는 것이다. 요즘 김대중이 자기 측근까지도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예를 들어, 윤상원 측에서, 518측에서 윤상원이 그 당시 광주에서 서울 보안사를 도청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내놓는다면 청문회도 필요 없었고, 김영삼 정권의 5.18 검찰이 수고할 필요도 없었으며, 현 정권의 과거사 조사위가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왜 좋은가? 왜 사람들이 정치 체제에 관한 한 조선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것은 노무현 같은 자가 사또 나리가 되거나 고을 원님이 되면 아무나 불러서 곤장 때려 고문하고 죄를 뒤집어 씌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은 민주주의는 사실의 객관성을 존중하기 때문이요, 그래서 인권이 보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처럼 명패 던져 고문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이다. 노사모가 명패던지는 노무현을 청문회 스타로 숭배하였을 때 이것은 객관적 사실을 멸시하고 노무현의 독단을 숭배하자는 것이었다.

만약 대한민국이 문명 사회라며,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5.18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분에게 온갖 누명을 씌우기 전에 먼저 윤상원이 퍼뜨린 루머에 객관적 진실성이 있는지, 그 출처는 무엇인지를 물어야 했다. 그럼에도 노무현은 윤상원의 거짓말을 맹신하자고 했다. 그리고 옛날 무고한 백성에게 곤장을 치며 자백하라고 하던 나쁜 원님의 습성대로 노무현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자백하라고 소리치며 명패를 집어던져 고문하였다.

1988년12월 7일 제1차 광주청문회 때 정호영 증인 한 명을 상대로 평민당 사기꾼들이 온종일 괴롭히고 협박하였으나 그들의 허위 주장만 하나하나 밝혀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백담사 유배 중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데리고 와 1989년 12월 21일에 제2차 광주청문회를 열었으나, 전혀 5.18 사건과 관련이 없었던 어른더러 도대체 무엇을 자백하라는 말인가? 그럼에도 윤상원이 퍼뜨린 거짓말을 맹신하자던 노무현의 논리에서는 객관적 근거 대신 노무현의 무식한 언성과 명패 던지기 고문만 있었을 뿐이었다.

http://cafe.daum.net/issue21

http://blog.paran.com/essaytown


참고하세요



사진 설명: 윤상원이 이끄는 폭도들이 광주 시민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광주 MBC 방송국에 방화한 시간은 5월 19일 15:30 이었다. 만약 이날 군경 합동의 인명 구조 작전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실로 그 참상은 클뻔하였다. 바로 이 시간 방화의 확산을 막고 인명을 구조하기 위해 화재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 4명을 시위대 버스가 깔아죽였는데, 아마 이 사진에 보이는 버스가 그 문제의 차량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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