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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소극적 가해자 정웅 광주향토사단 사단장
 
  음극과 양극이 부딪치면 전기가 발생하듯이 과격 시위와 과잉 진압이 충돌하면 폭동이 발생한다.  엎질러진 물은 되담을 수 없으며, 옷에 불이 붙어 타버린 옷은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 없다.  이처럼 어려운 것이 폭동 주동자 윤상원이 온갖 유언비어로 선동하여 발생한 과격 시위 진압 수단이었을 것이다.  5월 18일 오후에는 이미 폭도로 변한 시위대가 파출서들을 화염병으로 불태우고 있었으며, 광주 경찰 병력의 총출동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불길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오후 4시 40분에 마침내 광주 경찰의 시위 진압을 돕기 위해 광주향토사(31사단) 2개 대대의 공수 병력이 동원되었다.

  광주 경찰 병력으로는 치안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보고가 광주경찰서장과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의 명의로 정부에 보고되었다.  때는 1980년 봄 시위의 배후 조종자는 김대중이었으며, 내무장관이 경찰력으로는 더 이상 치안 유지가 어려움을 신혁확 총리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께 보고드렸던 시점이었으며, 이것이 5월 20일과 22일로 예정되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 봉기에 대비하여 5.17계엄 전국확대가 불가피하였던 시점이었기도 하였다.  그런데, 계엄 첫날 이런 사태가 발발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으며, 시위 진압을 위한 육군본부의 역할을 요청하였다.  광주의 시위진압을 위한 육본의 계엄군 동원 방침이 결정된 때는 오후 1시경이었으며, 대학 정문을 경비하던 광주향토사 병력은 오후 4시 40분을 기점으로 그 역할이 대학 정문 경비에서 시위 진압으로 바뀐다.  7명씩 조를 지어 온종일 대학 정문 옆에 서있었던 광주향토사 2개 대대 병력이 잠시 앉을 틈도 없이 다시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다.

  사실, 5.18광주사태의 본질은 그 당시 광주향토사가 어떤 방법으로 시위 진압을 하여야 옳았느냐의 질문에 대한 5.18항쟁 측의 답변에 달려 있다.  호남 출신인 정웅 사단장은 이 시위를 평화적으로 잠재우던가 아니면 확실하게 무력 진압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위 진압으로 오히려 시민들의 과격 시위가 폭동으로 폭발케 하였다.  문제는 그는 시위 현장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가보지 않고 진압을 지시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명령을 받은 부대는 『시민 여러분 집에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을 한뒤 1분도 안돼 진압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광주 군인사인 정웅 사단장 광주 인사들의 항의를 받고 나서야 그것이 과잉진압인 줄 깨닫고 5월 19일 23시 작전회의에서 강경진압명령을 무혈 진압 명령으로 변경 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사태가 이토록 심각해졌는데도 여전히 시위 현장에 순시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 폭동은 단순 시위가 아니라, 그 배후에 폭동 주동자 윤상원을 비롯한 일부 불순 세력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보지 않고 무혈 진압 명령으로 변경하였다는 사실이다.  광주의 파출서들이 폭도들에 의해 불타며 파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너무 우유부단하고 안일하게 대처하였다.  이것은 직무 유기였다.

  윤홍정 전교사 사령관이 5. 22 내각 개편서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소준열 장군을 5월 22일 10:00부로 전교사 사령관에 임명하여 진압작전을 수행케 하였다.  이것은 처음 4일간에도 폭동 진압 주체가 호남 출신 장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5월 22일 10:00부로 육군본부로 작전 지휘권이 넘어간 후에도  폭동 진압 주체가 호남 출신 장성이었음을 의미한다.  

  5월 19일의 진압작전은 전북 금마에 있는 제7공수여단에 의해 실시되었다.   19일 공용터미널 싸움은 밤 9시께 끝난다.  [특전사 전투상보]는 제7공수여단 35대대가 21일20분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최종점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간 임동파출소와 역전파출소가 시위대에 의해 피습되고 새정부 출범을 알리는 대형아치가 붙에 타는등 폭동의 불길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면, 광주 군인사들이 광주 사태의 발생 초기에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를 살펴보자.

  5월19일 월요일.  광주의 날씨는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더니 오후부터는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한다.  이날오전 상부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서 열린 군·관·민방위협의회대책회의장에 나타난 전교사사령관겸 전남북계엄분소장 윤흥정중장의 얼굴은 뭔가 잘못됐다는 표정으로 이날의 날씨처럼 안색이 흐려 있다.  계엄분소장자격으로 윤사령관이 소집한 이날회의는 일요일인 전날 시내에서 벌어진 전라도 병력 7공수 33, 35대대의 과잉 시위진압에 대한 기관장들의 항의와 윤사령관의 공수여단장등 군요인들에 대한 훈시가 하달된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정웅 31사단장은 자신의 부대에 배속받아 지휘권을 인계받은 7여단의 두 대대장으로부터 아무런 문제없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보고만을 받았을뿐이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날 시내에는 7공수여단 2개 대대병력에 이어 오전10시부터 서울에서 증파된 11공수 (여단장 최웅준장)의 61·62·63 대대병력이 추가투입돼 31사단에 배속된다.  즉, 광주사태 진압의 총지휘권이 호남 출신 군인사 정웅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에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폭동 진압을 계엄군 동원이 불가피하였던 당시 정황을 몇가지 살펴보자:

▲  당시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실 광주 31사단 소속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듯 싶다.  비교적 정확히 현장을 목격했다는 위성삼씨 (당시26·조대4)는 이때의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털어 놓는다.  [군중들이 MBC차고에서 취재차량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때 계엄군이 밀고 들어왔고 시위대는 계림동으로 다시 후퇴했다.  그곳에는 장갑차 1대가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감시경이 시민들에 의해 파손돼 있었다.  누군가 볏짚을 가져와 바퀴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고 내가 다시 볏짚을 뚜껑위에 올려놓았다.]   즉, 그는 폭도들의 MBC 취재차량 방화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온 계엄군 장갑차 승무원들을 모두 태워죽이려 했던 것이다.  민주화 항쟁 유공자 포상이 목적인지는 모르나 그가 이런 잔인한 범행을 자랑스럽게 증언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  이성전(화순시위 다이너마이트 운반.조작)= 화순에서 다이너마이트 2백발정도를 건네받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작해 시민군에 넘겨주었다.

▲  폭도들이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장갑차로 군인들을 압사시킨 사건.  5월 21일 12시 50분경 시위대 전면으로  나온 장갑차 1대가 공수부대 저지선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한다. 저지선이 순식간에 붕괴된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공수부대원들이 뿔뿔히 도청쪽으로 흩어진다. 병사 4-5명이 땅바닥에 쓰러진다. 이 과정에서 권용운일병이 사망하고 또다른 사병 한명이 중상을 입는다.  도청쪽으로 밀려난 공수부대원들이 권일병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을때 시위대 전면에 서 있던 광성여객버스 한대가 또 다시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하였다.  동료를 잃은 공수부대원들이 슬픔을 가눌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이렇게 폭도들이 살인적 공격을 하였으니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얼마나 공포감에 시달렸을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다.

  5월 18일 1,500 명이 동원된 광주 경찰의 진압 활동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점차 폭동 양상을 띠었던 것도 정부가 계엄군을 동원해야만 했던 사유였다:

  오전 11시 전남대 학생들은 광주역, 공용터미널, 가톨릭센터등을 거쳐 도청앞 진출을 시도한다. 경찰의 저지에 막혀 학생들이 중간집결한 곳은 공용터미널과 가톨릭센터. 두군데의 참여학생수가 각각 5백여명을 넘어서자 경찰은 가스차등을 동원, 해산을 시도한다.  이과정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공용터미널 대합실내에 최루탄을 무차별난사, 시민들의 분노와 함께 이날 오전 시위를 격화시키는 주요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찰 저지에 막혀 도심지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오전 시위상황은 충장로파출소와 동명파출소등 광주의 파출서들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과격 시위였다.

  광주시 파출서들이 폭동에 파괴됨에 따라 육군본부가 광주 대학 정문 경비를 맡던 7공수부대(전라북도 병력)에 가두시위진압지시를 내린 시점은 오후 1시였다.  당시 각 대학 정문에는 1개조 7명씩 경비를 서고 있었으니 수천명의 폭동 시위 진압을 이 몇명 되지 않는 군인들이 담당한다는 것은 실로 무리였을 것이다.  즉시, 광주수창국민학교에 집결한 7공수부대가 진압 작전에 동원된 시간은 정확히 오후 4시 40분이었다.  그런데, 호남 출신이자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으로서 진압의 총책임을 맡고 있던 정웅 장군은 폭동 현장에 와보지도 않고 시위 진압을 명령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은 일종의 직무 유기였다.

  전라북도 병력인 7공수의 진압 작전이 오후 4시 40분에 시작되기 전에 이미 과격 시위는 그 도를 벗어나 있었다.  오전에는 경찰과 경비병들에게 무자비하게 돌을 던지던 시위는 오후부터 동명·지산파출소 기습과 방화, 산수동 농장다리인근에서의 경찰 45명 억류, 식칼·각목등 살상 무기 등장 등 더욱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북도 병력인 7공수의 진압 작전이 오후 4시 40분에 시작되기 10분 전 4시 30분에 최규하대통령은 대통령특별성명을 통해 [5·17조치가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역설하지만 폭동주동자 윤상원은 폭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선동하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광주의 주요 군인사들, 즉 정웅 당시 31사단(광주향토사단) 사단장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폭동 발생 다음날까지 시위 현장에 와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직무 유기였다.  그리고, 광주 군인사들의 무책임한 과잉 진압이 광주 폭동을 더욱 확대시키자 5월 22일 이후 진압 작전 지휘는 광주 군인사들의 손에서 육군본부로 넘어간다.  시민군의 기관총 사격을 피해 계엄군이 5월 22일 자정 광주에서 철수한 후 닷새간 광주 외곽에 머물러 있던 계엄군은 5월 27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지휘하는 도청진압작전으로 전남도청을 폭도들의 손에서 광주 시민들에게 되찾아 주었다.

  광주의 대표적 군벌 정웅 사단장은 국가를 위해서는 폭동 진압에 무능하였으나 김대중 편에서는 일등 공신이었다.  그는 훗날 평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다.  그러나 시위 현장이 엎드리면 바로 코닿을 곳에 있는데도 가보지 않고 무력 진압을 지시하였다가 그 다음날 무혈 진압으로 바꾼 그는 너무도 무책임하며 무능하였다.  오히려 폭동 진압 지휘가 정웅에게서 육군본부로 넘어간 5월 22일 후에는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의 무력 충돌이 없었다.  단지 5월 27일 새벽 최소의 희생으로 도청에 진입하여 광주 사태를 종결시키는 작전이 있었을 뿐이다.  5.18 광주 사태는 우리가 그 원인을 파고들 수록 두 가해자는 윤상원과 정웅이었다.  윤상원은 귀중한 인명이 희생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악성 유언비어들을 조작하여 폭동을 선동한 가해자였으며, 광주 향토사 사단장 정웅 소장은 무책임한 과잉 진압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가해자였다.  만일 윤상원이 적극적 가해자였다면 정웅은 소극적 가해자였다.  그러나 폭동을 주동한 윤상원은 광주의 일개 노동자 신분이었던데 비해 정웅은 호남출신 장성이었으므로 그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美 뉴스 보도영상
  

518광주시민군 총기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때 무장시민군이 사용하던 총기


열띤 토론마당


영화 "화려한 휴가" 유언비어인가 사실인가?    

광주사태의 진실: 영화 "화려한 휴가" 실제인물 사진전    

과거사위의 깡통 무식 드러낸 "전두환 자위권 발동 주장설"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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