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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유언비어 유포한 서울대 운동권

 

사진설명: 1988년 12월 7일 광주청문회 때 민주정의당 이긍규 의원에 대한 답변으로 정호영 증인 광주사태 강경 진압 명령자는 광주사람 정호영 소장이었음을 증언하는 모습.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한 것도 광주사람 정웅 소장의 독단적인 행위였고, "경찰 병력으로는 안되니 너희가 시위를 진압하라"며 강경 진압 명령을 공수부대 대대장들에게 내린 이도 정웅 소장이었다는 정호영 증인의 증언 위에서 잘 들려요?

광주사태가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 5월 22일부터였다. 사실 그 전에는 80만 시민 광주시민들도 금남로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타지역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1980년 5월 22일 서울대 운동권이 전국에 퍼뜨린 유언비어는 오천 명이 학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5월 22일 그 시점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광주사태 전 기간에 걸쳐 생긴 사망자는 그 당시 계엄사가 발표한 150 여명이 정확한 숫자였음이 김대중 정권 때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노태우 정권 때부터 광주사태 부상자들에게까지 수억원 이르는 보상을 누차해왔으니 김대중 정권 하에서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이 추가 신고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추가 신고는 없었다. 그 150명 희생자 중에서도 수십 명은 군경이요, 상당수는 그 신원이 광주시민은커녕 대한만국 국민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광주사태 때 국군 총에 희생된 자들은 5월 27일 새벽 도청 진압 작전 때 군인 사망자를 합해 15명이 전부였다. 그것도 시민군 편이 먼저 발포하였기 때문에 부득히 취해진 자위권 발동이었다. 이런 점에서 1988년의 12월 7일의 광주청문회는 아주 잘못된 청문회였다. 발포는 시민군 편에서 먼저 하였다는 것은 명약 관화한 사실이 아니던가. 그러면 광주사태 주동자 윤상원은 왜 시민군에 발포 명령을 내렸는가. 이것은 그의 배후가 누구였느냐의 질문에 귀결된다.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군에 자위권 재가를 해 준 시점은 5월 26일 자정이었다. 따라서, 그 전에는 시민군 편에서 발포를 하여도 계엄군 편에서는 맞사격을 할 수 없었다.

윤상원이 5월 26일 야간에 잠들었을 때는 그가 잠든 사이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군에 자위권 재가가 줄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때였다. 만약, 알았다면 이튿날 새벽에 국군을 향하여 사격 명령을 내리는 무모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 여하튼, 윤상원에게 누설된 국가기밀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당시 광주사태를 기회로 북한군이 남침하려 하자 미국이 5월 22일 항공모함을 부산항에 입항시킨 것은 국가기밀이었는데, 윤상원은 알고서 미국이 시민군 지원을 위해 항공모함을 부산항에 입항시켰다는 대자보를 광주시 전역에 부치게 하였었다.

누가 윤상원에게 그런 정보들을 제공하였는가? 녹두서점이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사 암살을 시도했던 단체도 김대중이 그 단체장이었던 조총련계 한민통이었으며, 일본인 신분으로 입국하여 광주사태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단체도 한민통이었다. 그간 운동권이 유통시키던 시위진압 사진과 영상물도 한민통이 일본 기자의 신분으로 5월 19일에 촬영한 것들이었다. 5월 17일 서울에서 유시민이 선동한 시위대가 경찰 5명을 버스로 깔았다. 그리고, 5월 19일 윤상원의 시위대가 순경 4명을 깔아죽이면서 곳곳에 방화하였을 때 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공수부대가 출동하여야 했으며,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민통이 그 장면을 촬영하였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이것이다. 1980년에 북한 공산주의 이념 서적을 운동권에 대낮에 판매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의 동생 증언에 따르면 형 친구가 정보부 모 인사였으며 뒤를 봐주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미 항공모함 부산항 입항 정보도 그 이가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김상윤의 친구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김대중 심복 이종찬씨가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으로 최고위 실무자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조총련계 한민통에 줄을 대고 있었던 김상윤과 그 단체장으로 일본에서 간첩질하던 김대중의 관계를 물어보아야 한다. 윤상원의 동지이자 노동시인인 박노해의 "윤상원 평전"은 김대중과 윤상원의 관계를 이렇게 증언한다. 즉, 김상윤의 추천으로 윤상원이 「민주 회복 통일 국민회의」 사무국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단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재야 단체들 중 최상위 단체였으며, 이 단체의 사무국장이 되었다는 것은 김대중 정권 창출을 위한 최고위 실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개 서점 주인이 일개 노동자를 그런 중책에 추천하자 김대중이 즉석에서 승낙했다면 김대중과 김상윤의 관계가 가히 짐작가는 대목이 아닌가.

박노해는 그 과정을 이렇게 서술한다:

<<뒤늦게 운동을 시작했지만 상원은 광주 운동권 내에서 노동운동의 중심부로 자리잡아 갔다. 상원은 일신 방직, 화천기 공사, 아시아 자동차 등의 남성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에 관여하면서, 야학 졸업생으로 구성된 소모임을 통해 노동 운동가를 육성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원은 김상윤의 추천으로 「민주 회복 통일 국민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적 역량으로 조직화하는 작업에 주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당면한 정치투쟁의 중대한 의미를 그는 과소 평가 하지 않았다. 현장에만 틀어박히고 노조 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혁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노동자계급의 근본적인 해방을 위해서는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올바른 원칙을 상원은 투철히 자각하고 있었다. 「민주 회복 통일 국민회의」사무국장 선임 과정에서 윤한봉이 상원을 독선적이라고 평가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장기표와 김상윤의 강력한 설득으로 사무국장에 선임됐다. >> (출처:
http://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nnew=2&y_number=246
)

여기서 우리는 서울대 운동권이 5월 22일부터 대자보로 전국에 유포하였던 유언비어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은 5월 18일 전두환이 경상도 출신으로 구성된 공수부대를 보내 총을 난사하여 광주시민 오천 명을 사살하였으며, 공수부대에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공수부대 동원은 광주경찰서장과 광주시장의 요청에 따라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광주향토사에 배속된 공수부대를 동원하였던 것이었으며, 5월 18일 사망자는 없었고, 단지 시위대가 5월 19일 버스로 깔아죽인 순경 사망자가 4명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게 오천 명 사망자는 직접 확인해 본 숫자였는지, 그리고 전두환이 "공수부대에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은 직접 들어보고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사실,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 그런 유언비어를 전한 매체는 녹두서점 전화였다. 그리고, 윤상원이 그런 거짓말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었을까? 박노해가 말하는 혁명, 바로 그 목적이 윤상원에게 유언비어 제조를 스스로 정당화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여하간 윤상원 의도는 서울에서도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5월 17일 유시민의 시위대가 순경들을 깔아죽였을 때 실제 범인은 한민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고는 윤상원에게 과장되어 알려져서 광주에서 신호탄을 보내면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였던 듯하다. 도대체 윤상원을 무엇을 위하여 녹두서점 전화에 매달려 서울 운동권에 그런 유언비어들을 퍼뜨렸단 말인가? 그의 의도는 신호탄을 보내는 것이었으며, 서울대 운동권은 그런 무기 탈취 등의 과격한 행동 대신에 유언비어 대자보를 전국 대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윤상원에 협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하에서 "광주항쟁사"라는 용비어천가를 연재하던 광주일보도 5월 18일 수천 명이 죽었다는 유언비어 대목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한다. 그래서 그 상황을 광주일보는
http://www.kwangju.co.kr/518/027.asp
에서 이런 기사로 설명한다:

<< 진압군은 모두 경상도 군인이다. 광주사람 70%를 없 애도 좋다는 명령을 받앗다고 한다. 전라도 씨를 말리려 왔다고 한다. 계엄군에게 흥분제나 독한 술을 먹였고 군인들의 수통에는 술이 들어 있다. (....) 5.18이 끝난지 5년이 지난 85년 국방부가 발표한 광주사태의 실상 중 유언비어 부분을 인용해본다. 국방부는 5.18초기단계 광주에 광범위 하게 퍼져있던 공수부대 관련 소문들이 시위주도 학생들에 의해 조작돼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을 격분케 했다는 학생들에 의한 의도적 유포설을 주장했다.

유언비어의 유통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10대들의 말초신경 자극에서부터 중년층의 격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대계엄군 투쟁의식 유발등으로 연결되는 계획적인 일면을 찾아볼수 있다. 물론 이런 유언비어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광주사태 사망자에 대한 검 시결과 18일 사망자는 없었으며 더구나 총사망자 1백91명 가운데 칼에 찔려 사망한 여자는 단 한명도 없다. 더구나 대한민군 군부대내에 어 느 특정지역 출신자로만 조직된 부대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당 시 유포됐던 유언비어는 학원소요를 배후조정한자들이 군에 대한 일반 적인 상식도 없는 (군미필자) 불순분자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유포 한 것으로 보여진다. >>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1988년 광주청문회 논리는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1988년 광주청문회 논리는 사기꾼들의 퍼뜨린 유언비어를 두둔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거짓말이 민주화 운동일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싶다면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들에게 그 유언비어의 출처와 근거를 물어보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광주시대 가해자가 있었다면 그 가해자는 1980년의 서울대 운동권이었다. 본래 윤상원이 유포한 유언비어들은 악의적이었다. 공산주의 변증법 논리는 혁명을 위해 개인의 삶이 희생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윤상원의 의도는 군경과 민간 사이에 유혈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누구둔 그 날 수천 명이 죽었다느니,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느니 하는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이성을 잃기 쉬우며, 무장 시민군의 존재는 진압을 불가피하게 한다. 따라서, 1980년 5월 22일경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작성하여 긱 대학에 내려보냈던 서울대 운동권은 먼저 윤상원에게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설의 근거가 있는지 먼저 물어야 했다. 그런 사실 확인 없이 악의적 유언비어를 복사하여 유포하는 것은 그런 악의적 행동에 동참한 것이었다.

따라서,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누가 악의적 허위 유언비어들을 퍼뜨렸는지, 그리고 어떤 출처를 가지고 퍼뜨렸는지 알아야 한다. 십중 팔구 분명 한홍구는 그 당시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 작성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럴진대, 만약 한홍구가 광주사태에 대하여 참으로 언급하고 싶다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 작성자가 누구였는지 먼저 공개하여야 할 것이다.

http://cafe.daum.net/issue21

광주사태 증언자료
http://cafe.daum.net/518cafe


참고하세요


수십 만발의 실탄의 보유하고 있던 시민군의 무기 사진이 도청진압작전이 불가피하였던 상황을 증언한다.

5월 27일 아침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하는 계엄군. 도청진압작전에 성공하여 도청을 광주 시민들에게 되찾아준 계엄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난동자들의 무기 회수었다. 민주화 운동을 위해 저 많은 무기들이 필요했다는 주장은 기껏해야 사기요,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무기 반납을 열흘간 호소하였으나, 시위대가 내건 조건은 정권을 넘겨달라는 것이었을 때 최규하 대통령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했다. 그리고 시민군 무기가 회수된 바로 그 순간에 광주의 모든 생활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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