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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광복군을 주적으로 삼던 마적단이 독립군이라는 KBS

 

1945년 9월 2일 미주리 호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 한일합방 문서가 무효화되고 공식적으로 조국이 해방되었다.

 

KBS 에 묻는다. 현재까지 KBS드라마 서울1945 의 줄거리를 보면 1944년경 러시아로 탈출한 공산주의자 문동기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으며, 문동기의 경력을 잣대로 공산주의 계열(좌익)은 항일운동가들로 묘사하는 반면에 이승만 박사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무릇 사극에는 제작자와 시청자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사료가 있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KBS측에 문동기가 독립군이었음을 조금이라도 보여줄 사료를 요청한다. 이는 동북항일연군이 본래 만주에서 조선족 약탈을 하기 위해 생겨난 무장 조직이기에 동북항일연군이 독립군이라는, 더구나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KBS드라마 줄거리에 우리가 경악하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은 처음 1936년에 창군될 때부터 만주의 2백만 조선족 동포를 약탈하기 위해 조직된 마적단이었다. 그들은 항일을 만주국 공격, 좀 더 구체적으로 만주국의 조선족 공격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일제 시대에 이수광과 여운형이 똑같이 일본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다. 그런데, 왜 해방후 여운형이 항일운동가로 둔갑하는가? 종전 후 동경전범재판 때 다수의 일본 전범들은 무죄가 되고, 다수의 조선인 강제부역자들이 대신 전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친일파 개념이 너무 확대되어 사용되었고, 또 그 의미가 연합국 군검사들에게 오해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애절한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좌익의 거센 친일파 척결 목소리가 일본 전범들은 무죄가 되고, 강제부역 노동을 하던 조선인들이 전범으로 몰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었다.

일본인들이 자기네 전범 구명 운동을 모두 발벗고 나섰을 때 우리는 억을하게 전범 누명을 쓴 그들이 일본인도 아니며, 더구나 강제부역자들이었을 뿐이라는 말 한마디 해주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는 말인가? 조국이 그들에게 친일파 낙인을 찍었을 때 그들은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친일파라는 낙인에 모든 진실을 숨기고 사실을 왜곡하는 무서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해방 직후가 친일파 척결의 시기는 아니라는 애국지사들의 판단이 현명하였는가? 너무 섣부른 친일파 척결이 친일이었다. 친일파 척결 논리가 일본 전범들은 무죄가 되게 하고, 강제로 끌려가 남양군도에서 노동하던 우리 동포들은 무수히 많은 이들이 전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태평양전쟁 강제부역자들이 친일파들이었는가? 억울하게 전범으로 몰린 동포들을 구명하려 했었기에 이승만 박사가 공산주의 계열로부터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는가? 전범재판 기소자 수로 보면 조선인의 수가 20배를 넘었으니 전범재판 기록상 한국이 전범국이 되는셈인데, 그때 좀 더 신중할 수는 없었을까? 친일파 척결을 하더라도 자기 민족 손에 해야지 왜 연합국 전범 형장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는 말인가!

국제정치학의 안목에서 친일파 척결은 해방과 독립 무효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 을사보호조약이 본래 조선인 백만인 청원으로 이루어졌던 것이기에, 그리고 한일합방 때도 일본이 군사적 침략을 한 사실이 없기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국제사회에서 한일합방 문서는 조선인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무려 33년이 걸렸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3년 11월 상해임정의 이승만 박사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야 했다.

일본도 한일합방 문서 무효화가 명시된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려고 결사 저항했으며, 미군측에서도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십만이 훨씬 넘는 대군이 전사하여야 했다. 한일합방 문서 무효화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방 병사들의 피의 댓가로 얻어진 고귀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강압적으로 한일합방 문서 무효화를 요구할 근거는 그것이 조선인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이승만 박사의 설명을 신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친일파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한일합방이 조선인 자의냐 타의냐의 문제에 대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친일파라는 용어는 늘 영어로 오역되었었다.

1905년 고종 황제께 보호조약을 청원한 조선인의 수가 백만 명이라는 것도 역사 논리로는 우리에게 불리하거늘 해방 직후에 엄청난 수의 친일파 척결을 하였을 경우 외국인의 눈에는 한일합방 문서는 조선인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일본측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대의 애국지사들은 해방 직후에는 먼저 건국을 하고, 해외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고, 국가건설을 하는 것이 순서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건국 이전의 한국은 외국인의 눈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KBS 드라마의 내용대로라면 여운형씨는 해외의 국가승인은커녕 아직 정부도 구성되지 않았을 때 친일파 척결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려 하였다. 사실, 정부가 수립되어도 국고는 텅비어있고, 미국의 원조 없이는 식량도 달러도 없었던 시대에,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면 식량은커녕 석유 수입을 못해 전기 공급이 중단되고, 교통 수단이 없어져 하루아침에 원시시대로 회귀하게 돨 그 시대에 여운형에게는 친일파 척결이 급선무였는가?

해방 전에는 친일 부역을 하고 해방 후에는 친일 부역자 척결을 외쳤던 여운형씨에게 좌익 합작 논리는 무엇인가? 이승만 박사는 억울하게 전범 누명을 쓴 동포들을 구명하자고 했고, 좌익 진영에서는 냉소하였다. 여기서 좌우합작 논리가 가능할 수 있는가? 전범 누명을 쓴 동포들을 구명하든가 말든가 단 하나의 선택이 있을 뿐이지 그 중간 선택은 불가능하였다. 연합국 군검사들에게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며 강제로 끌려갔을 뿐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친일파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중간 선택점은 있을 수 없었다.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 친일파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전범재판시 무죄와 B급 전범을 가름하는 연합국 군검사들의 기준은 단 하나 자의냐 타의냐였다. 그래서 마루타 생체실험부대 일본군 장성은 타의에 의한 복무였다는 이유로 무죄가 되고, 남양군도 조선인 근로자들은 자의로 친일 부역했다는 이유로 B급 전범이 되었다. 이렇듯,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까지 친일파라는 용어를 확대 사용할 경우 엄청난 논리적 비약의 문제가 생긴다.

일제 시대에 이광수와 여운형이 똑같이 일제 말기에 일본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을진대 이광수는 친일파로 단죄하고, 여운형은 항일운동가로 서훈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실제에 있어, 여운형씨가 일본군과 싸운 적은 없으나, 동포를 상대로 친일파 척결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항일운동가로 알려졌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의 항일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1912년 중국 신해혁명 직후 한족 군벌들이 만주를 침략하여 동만주와 북만주와 만주로 분할 통치하였는데, 장군님으로 불리던 한족 군벌들은 국민당이란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이름뿐의 관계였고,사실상 권력을 세습하는 국왕 혹은 절대 군주의 위치에 있었다. 이것이 어려서부터 만주에서 자란 가짜 김일성이 아는 유일한 국가 모델이었고, 훗날 북한 주석이 된 후에 그 모델, 그 체제를 그대로 북한 통치에 적용하였다.

1931년에 만주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이러하다. 자, 김대중이 대통령 재임기간중 1억불을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 입금하였는데, 거기까지는 국민이 이해해도 만약 대통령이 개인 사업에 손대면 국민 감정을 자극할 것이다. 만약 일제 시대 조선총독이 공직자의 몸으로 백화점을 직접 운영했다면 번일 감정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만주에서 한족 군벌들간에 있었다. 그들은 절대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이면서도 큰 사업 상권을 장악해 나갔기에 만주족의 독립운동을 자극하였다.

관동군도 국가간의 계약에 의해 자유항 관동주와 만주철도 수비를 하고 있었으나, 현대 무기 등 한족 군벌이 원하는 것들을 댓가로 주고 주둔하고 있었다. 한족 군벌은 그 무기로 무장하고 만주족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1929년 후반부터 한족 군벌들이 일본이 러일전쟁 후 러시아로부터 승계한 만주철도 부설권 등을 빼앗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항 관동주 99년 조차권마저 관동주와 협의 없이 영국 등 서구국가들에 넘기려 시도하였기에 생긴 앙금과 러시아군의 남하 그리고 무장 한족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만주족의 노력 등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그 이듬해 만주족이 만주족으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모셔 독립선언을 한다.

만주에서 항일이란 말은 누가 사용하였는가? 만주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지배하였던 무장 한족이었다. 중일전쟁은 1937년에 시작되었는데, 왜 만주족이 1932년에 독립하여 완성되어 1934년 만주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정하였으며, 신국적법이 무장 한족의 옛국적을 인정않던 시기에 항일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는가? 만죽국 독립 이전에는 관동군으로부터 현대 무기를 받아서 만주족을 무력 통치하였던 무장 한족이 갑자기 항일이란 말을 사용하였을 때 그들은 만주국 침략, 특히 만주국 거주 조선족 약탈을 항일이란 뜻으로 사용했었다.

자, 여기서 한족 군벌과 조선족의 관계를 설명해 보자. 1912년부터 만주를 한족 군벌이 통치하자 한족 군벌과 일본 정부 사이에 만주의 200만명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각에 마찰이 생긴다. 사실, 일본인들은 면세 지역인 자유항 관동주에몰려 있었음에도 조선족의 번창을 일본의 만주 침략이라는 의혹의 눈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만주를 통치한 한족 군벌은 조선족이 무국적자라는 구실로 조선족 토지를 합법적으로 몰수하는 법을 제정하고 여러차례 시행하려고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유항 관동주 일본계 관리들은 만주의 조선족도 일본 시민권자들이라며 조선족 국적을 보호하여 한족 군벌이 조선족 토지를 법으로 몰수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1932년 만주족이 독립하여 건국한 만주국이 조선족에 만주국 국적을 부여하는반면에 무장 한족의 옛국적을 무효시키자 무장 한족은 그때부터 무력으로 조선족 토지 약탈을 시도했으며, 조선족 재산 약탈이 항일이라는 공산당 마적단의 논리는 여기서 출발하였다.

만주의 무장한족을 공식명으로 동북군이라고 불렀는데, 만주국이 건국되자 동북군 중 일부는 부의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새국적법에 따른 만주국 국민의 자격으로 훗날 만주국군 창군 요원이 되었으나, 일부는 군벌 쟝쉐량을 따라 국민당 국기를 군기로 정하고 명색이나마 국민당 소속군이 되었으며, 나머지 일부는 무력으로 조선족 토지를 빼앗기 위해 공산당 군대를 형성하였는데, 만주에서 한족 군벌이 만주의 조선족 약탈을 목적으로 1935년에 동북인민혁명군이란 이름으로 구성한 이 군대가 바로 동북인민혁명군이란 이름의 마적단이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당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처럼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단지 조선족 민가 습격이 생계 유지 수단이었을 뿐이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지주의 토지와 사업가의 재산을 모두 몰수할 수 있다는 사탕발림이 당시 무장 한족들로 하여금 쉽게 공산당에 가입하게 한 동기부여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이 하는 일이 바로 다름아닌 조선족을 주적으로 간주한 군대였는데, 조선족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 아니다. 조선족에도 만주족에도 공산당 적군의 침략을 막교 조국을 지키기 위한 의병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들 역시 훗날 만주국 국군 창군요원이 된다. 만주국 조선족 사이에도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의 정강정책이 오늘날 중국이 시도하고 하는 동북공정, 즉 한반도는 중국역사의 일부라는 논리의 출발점이었다. 그들의 정강정책 어디에도 조선독립운동이라는 말은 없다. 우선 제 1항에 동북에서 만주국의 통치를 전복한다는 것이요, 9항은 中 , 韓 , 蒙의 피압박민족은 밀접히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만주정부를 타도한다는 것일 뿐, 정강정책 그 어디에도 중국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연대하던가 한다는 내용이 단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티베트인들이 항일연군이란 말에 속았다가 중국인들에게 국토을 영영 빼앗기고도 여태껏 국제사회에서 하소연할 논리가 약한 것은 항일연군에 참여한 티베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조선인들 중에도 동북인민혁명군에 속아넘어간 자들이 있었다.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한인들로 구성되어있었음에도 한인공산주이자들의 항일무장투쟁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해 싸워야 하며(제 7항), 민족혁명전쟁에 대해 중공당의 지도를 받고 옹호해야 된다(제 8항)고 하여 중국 공산당의 용병노릇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다.

더욱이 민생단사건으로 인해 동북인민혁명군 내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반공주의자로 오인 받아 아무 죄도 없이 400명이나 학살당했다. 이것은 민족주체성의 확립은 물론 한국의 독립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중국공산주의운동일 따름이다. 보라, 동북인민혁명군이 조선족을 주적으로 삼았는데 어찌 조선족에 반공주의자가 한 명도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동북인민혁명군은 자기네에게 충성한 한인공산주의자들마저 반공주의자들로 몰아 숙청하였으니 이른바 민생단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그럴듯한 정치적 이유로 숙청이 시작되었지만, 일단 숙청이 가속화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밥을 흘려도 민생단(어렵게 구한 식량을 허비하니까), 밥을 설구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민생단(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은 전투력을 약화시키니까), 배탈이 나거나 두통을 호소해도 민생단, 사람들 앞에서 한숨을 쉬어도 민생단(혁명의 장래에 불안감을 조장하니까), 설사를 해도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고 말해도 민생단(민족주의와 향수를 조장하니까), 일이 어렵다고 불평해도 민생단, 일을 너무 열심히 해도 민생단(정체를 감추려고 일을 열심히 한 것이니까), 일제의 감옥에서 처형되지 않고 살아돌아와도 민생단, 오발을 해도 민생단, 가족 중에 민생단 혐의자가 나와도 민생단, 민생단 혐의자와 사랑에 빠져도 민생단,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민생단으로 몰리는 등 무고한 사람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모는 꼬투리는 끝이 없었다.

그럴진대, 과연 KBS는 동북인민혁명군이 이렇게 우리 동포들을 죽인 것을,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한 분들의 수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반해 이렇게 동북인민혁명군이 우리 동포들을 마구 학살한 것을 조선독립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이것이 KBS 드라마1945에서 문동기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서 행한 일이었다는 말인가? 어째서 그것을 조선독립운동으로 미화해 방송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동북인민혁명군이 행한 조선족 학살을 기억하는 중국인들이 그 드라마를 본다면 뭐라고 손가락질 할 것인가?

1935년에는 조선인이 대부분이었던 동북인민혁명군이 그 다음해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명되면서 한족의 숫자가 늘어나는데, 1936년 시안사건 때문이었다.

1936년의 모택동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리고, 동북군을 거느리던 군벌 쟝쉐량은 분명 국민당 정부 신하였으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제석 총통이 쟝쉐량에게 모택동 군대를 공격하라고 권유하기 한발 앞서서 모택동이 사탕발림을 한듯하다. 아마 그 사탕발림은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한족이 다시 만주족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쟝쉐량은 자기에게 공산당 토벌 군령을 내린 자기 주군 장제석 총통을 체포 감금하였다가 나중에 자신이 국민당 군대에 체포 감금된다. 이후 오갈곳이 없어진 쟝쉐량의 부하들이 더 많이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몰려들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된다.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족에 대한 시각을 청나라 이후 그리고 만주국 이전의 만주 지배자들이었던 한족 군벌들에게서 승계하였다. 만주국 건국 이후 조선족은 만주국 일등 국민이 되었으며, 국적을 가지고 당당하게 각종 고시에 응시하여 정계 등 각 분야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만주에는 일본인이 별로 없고 관동주라는 자유항에 몰려있었을 뿐이다. 과동주 거주 일본인들에게는 만주국 국적과 일본국 국적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력이 민주국과 일본국 양편에서 있었던 반면에 조선족에 대하여는 그런 압력이 없어 양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동북항일연군 편에서는 조선족은 일본의 앞잡이요, 조선족의 번창과 사회적 지위 향상이 일본 경제의 만주 침투라고 주장할 근거였다.

동북항일연군이 일본군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관동군은 저 멀리 북쪽 만소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러시아군 만소국경 침범을 막고 있었는데, 동북항일연군이 북편으로 이동하여 군사작전을 벌인 일이 있었는가? 관동군이 팔로군 토벌에 나선 것은 1939년 중일전쟁이 한창이었을 무렵 그 기회를 타 러시아군이 남침을 시도하려 하였을 때 소만국경으로 집결할 시기였다. 그 시기에 관동군이 만 명에서 70만명으로 증강되어 러시아의 남침에 대비하면서 만주국 동맹국으로서 만주 침략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러시아군이 만소 국경지대로 집결한 틈을 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략하였으므로 스탈린의 만주와 한반도 재침략 계획은 1945년 8월로 6년 연기되었다.

관동군이 소만국경을 수비한 것을 침략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1904년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 침략을 시도하였을 때 이미 만주를 점령하였었는데,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자로 만주족의 국토를 되찾아주었던 것이며, 러일전쟁의 패자 러시아가 다시 20년간 군사력을 키워 재침략을 시도하던 1932년 만주 의병들이 스스로 막다가 국경이 다 뚫린 후에 뒤늦게 관동군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관동군이 입은 피해와 타격이 컸기에 소만 국경은 관동군에 맡기고, 만주국군은 중국공산당의 침략 방어에만 전념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되어 만주국 군주 부의가 관동군에 만소국경 주둔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만주국의 독립과 시안사건으로 만주에서도 국민당 정부로부터도 국적과 소속을 상실한 무장 한족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의 본 모습은 마적단이었다. 그러나, 같은 한족이나 만주의 본주인 만주족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이 일본침략의 앞잡이라는 논리로 조선족을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 무국적 무소속 동북항일연군은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민가를 수시로 급습하여 재물과 곡식을 약탈하는 마적단이었던 바 조선족 민가 약탈로 군수품을 조달하였던 것이다.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보천보전투도 물자보급의 일환으로 동포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한 패악무도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동북항일연군은 항일이란 명분으로, 공산주의 혁명이란 명분으로 조선족 민가를 습격하였으며, 만주국 시민이었던 조선족 보호를 위해 출동한 만주국 경찰과 한두번 교전했다 하여 조선독립전쟁이라 미화할 수 없다. 마적단에 시시때때로 약탈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경찰마저 외면해야 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만주국 경찰의 자국 국민 보호를 일본 침략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동북항일연군은 국제정치학적 시각에서 보아도 독립군으로 간주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임시정부 광복군의 동맹군은 장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군이었다. 그런데 동북항일연군은 국민당 정부군을 적군으로 간주하였다. (해방되자마자 여운형의 건준이 어째서 상해임정의 귀국을 불허하였는가? 그것은 건준이 세우려는 나라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으려는 나라요,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적국 상해임정을 적국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국민당 정부의 우방 상해임정을 적국으로, 국민당 정부군의 동맹군 광복군을 적국으로 간주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주적이 광복군이었다. 일시적 국공합작? 그러나 여운형의 좌우합작 논리가 그러하였듯이 일시적 국공합작이 중국 공산화 전략이었으며, 장제석 총통은 공산당 전술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티베트는 온전한 독립국이었음에도 중국공산당이 연군을 조직하자고 하더니 아예 티베트 전 국토를 삼켜버렸다. 오늘날 중국 발전의 원동력도 만주의 산업과 자원에 있을진대 만주국이 독립국으로 남아 조선족이 주인노릇하는 것이 조선족에도 좋고, 우리 민족에도 좋은 일이거늘 도대체 중국공산당에 갖다 바치는 것이 어째서 조선독립운동이란 말인가? 티베트인들은 국토를 영영 빼앗겼으며, 조선족은 점차로 소멸되어가고 있으며, 동북항일연군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구실로 한반도 역사까지 지금 저들의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지 아니한가.

해방 후에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실, 우리 민족 독립을 가능하게 한 이는 1943년 11월 6일 카이로 회담 때 조선독립론을 주장한 장제석 총통이었다. 그런데,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만주의 조선족은 은혜를 악으로 갚았다. 국민당은 만주를 공산군에 빼앗겼을 때 산업자원과 산업에서 모택동에 열세가 되었다. 그런데,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를 추방하고 모택동 군대를 불러들인 이들은 다름아닌 조선족이었다. 본래 만주족은 반공시민들이었으며, 한족 군벌도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반공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나, 조선족이 공산군이 앞잡이가 되어 만주가 모택동 손에 넘어가게 하였다.

모택동은 그 공을 악으로 갚아 한국전쟁 때 조선족을 인해전술 의용군이 되게 하여 그들 선조의 조국을 침략하게 하였던 것이다. 간사한 모택동이 한족을 인해전술에 동원하지 않았다. 바로 만주의 조선족을 인해전술 의용군에 동원하여 일주일분 미수가루만 주고 돌격하라 하였다. 살아돌아올 생각 하지 말고 자기 동포를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만약 조선인들만 동북항일연군에 속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과 동질성이 있는 만주족과 조선족으로 구성된 만주국은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였을 것이요, 중국과 한반도, 러시아와 한반도 사이에서 만주국이 완충국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만주의 무진장한 자원을 우리 민족이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택동에게 만주를 갖다바쳐서 조선 독립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만약 의용군으로 동원할 조선족이 없었으면 중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요, 우리 민족은 통일되었을 것이다.

만약 1943년 11월 6일 카이로 회담 때 쟝제석 총통이 우리 민족 독립을 위해 대미 외교를 벌여야 할 유일한 근거는 국민당 정부군의 동맹군이 광복군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의 판단에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수가 광복군 수보다 많다고 판단하였으며 조선 독립론을 루즈벨트 대통령께 설득하였을리 있는가? 동북항일연군 내에 조선인 수가 조금만 더 많았어도 우리 민족은 영영 해방과 독립을 맞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외교적으로 조선독립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동북항일연군을 독립군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KBS 에 묻는다. KBS드라마 서울1945 는 문동기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이었으므로 항일운동가요, 반공주의자는 친일파라는 논리 구도로 줄거리가 전개된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반공주의가 있었는가? 반공주의는 해방 후에 나타났다. 함흥 등 러시아군이 진군한 지역에서 붉은완장찬 무리들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했던 애국동포들을 색출하여 도끼로 때려죽이니깐 부모와 재산을 잃은 자녀들이 월남하여 반공 활동을 한 것이 시초였다. 따라서 반공을 친일로 묘사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순군한 용사들에게 모욕이 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KBS측이 시청자들에게 조선족 약탈을 항일이란 뜻으로 사용했던 동북항일연군이란 마적단이 어째서 독립군이라는 것인지 밝혀줄 것을 희망한다.

우리가 KBS 측에 문동기가 항일운동한 근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해야만 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로, 한류 열풍을 타고 중국에서 이 드라마를 볼 경우 영락없이 중국의 동북공정논리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만약 문동기가 조국 해방의 영웅이라면 그 공은 자연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게 된다. 역사 기록상 동북항일연군내 조선인은 모두 하급 졸개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외국노동자가 자기가 한국 기업주라고 떠들고 다니면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것이다. 둘째로, KBS 에 묻는다. 현재까지 KBS드라마 서울1945 의 줄거리를 보면 1944년경 러시아로 탈출한 공산주의자 문동기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으며, 문동기의 경력을 잣대로 공산주의 계열(좌익)은 항일운동가들로 묘사하는 반면에 이승만 박사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무릇 사극에는 제작자와 시청자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사료가 있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KBS측에 문동기가 독립군이었음을 조금이라도 보여줄 사료를 요청한다. 이는 동북항일연군이 본래 만주에서 조선족 약탈을 하기 위해 생겨난 무장 조직이기에 동북항일연군이 독립군이라는, 더구나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KBS드라마 줄거리에 우리가 경악하기 때문이다.

동북항일연군은 처음 1936년에 창군될 때부터 만주의 2백만 조선족 동포를 약탈하기 위해 조직된 마적단이었다. 그들은 항일을 만주국 공격, 좀 더 구체적으로 만주국의 조선족 공격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일제 시대에 이수광과 여운형이 똑같이 일본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다. 그런데, 왜 해방후 여운형이 항일운동가로 둔갑하는가? 종전 후 동경전범재판 때 다수의 일본 전범들은 무죄가 되고, 다수의 조선인 강제부역자들이 대신 전범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친일파 개념이 너무 확대되어 사용되었고, 또 그 의미가 연합국 군검사들에게 오해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애절한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좌익의 거센 친일파 척결 목소리가 일본 전범들은 무죄가 되고, 강제부역 노동을 하던 조선인들이 전범으로 몰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었다.

일본인들이 자기네 전범 구명 운동을 모두 발벗고 나섰을 때 우리는 억을하게 전범 누명을 쓴 그들이 일본인도 아니며, 더구나 강제부역자들이었을 뿐이라는 말 한마디 해주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는 말인가? 조국이 그들에게 친일파 낙인을 찍었을 때 그들은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친일파라는 낙인에 모든 진실을 숨기고 사실을 왜곡하는 무서운 힘이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해방 직후가 친일파 척결의 시기는 아니라는 애국지사들의 판단이 현명하였는가? 너무 섣부른 친일파 척결이 친일이었다. 친일파 척결 논리가 일본 전범들은 무죄가 되게 하고, 강제로 끌려가 남양군도에서 노동하던 우리 동포들은 무수히 많은 이들이 전범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태평양전쟁 강제부역자들이 친일파들이었는가? 억울하게 전범으로 몰린 동포들을 구명하려 했었기에 이승만 박사가 공산주의 계열로부터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는가? 전범재판 기소자 수로 보면 조선인의 수가 20배를 넘었으니 전범재판 기록상 한국이 전범국이 되는셈인데, 그때 좀 더 신중할 수는 없었을까? 친일파 척결을 하더라도 자기 민족 손에 해야지 왜 연합국 전범 형장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는 말인가!

국제정치학의 안목에서 친일파 척결은 해방과 독립 무효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 을사보호조약이 본래 조선인 백만인 청원으로 이루어졌던 것이기에, 그리고 한일합방 때도 일본이 군사적 침략을 한 사실이 없기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국제사회에서 한일합방 문서는 조선인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무려 33년이 걸렸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3년 11월 상해임정의 이승만 박사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야 했다.

일본도 한일합방 문서 무효화가 명시된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려고 결사 저항했으며, 미군측에서도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십만이 훨씬 넘는 대군이 전사하여야 했다. 한일합방 문서 무효화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방 병사들의 피의 댓가로 얻어진 고귀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강압적으로 한일합방 문서 무효화를 요구할 근거는 그것이 조선인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이승만 박사의 설명을 신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친일파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한일합방이 조선인 자의냐 타의냐의 문제에 대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친일파라는 용어는 늘 영어로 오역되었었다.

1905년 고종 황제께 보호조약을 청원한 조선인의 수가 백만 명이라는 것도 역사 논리로는 우리에게 불리하거늘 해방 직후에 엄청난 수의 친일파 척결을 하였을 경우 외국인의 눈에는 한일합방 문서는 조선인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일본측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당대의 애국지사들은 해방 직후에는 먼저 건국을 하고, 해외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고, 국가건설을 하는 것이 순서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건국 이전의 한국은 외국인의 눈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였다.

KBS 드라마의 내용대로라면 여운형씨는 해외의 국가승인은커녕 아직 정부도 구성되지 않았을 때 친일파 척결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려 하였다. 사실, 정부가 수립되어도 국고는 텅비어있고, 미국의 원조 없이는 식량도 달러도 없었던 시대에,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면 식량은커녕 석유 수입을 못해 전기 공급이 중단되고, 교통 수단이 없어져 하루아침에 원시시대로 회귀하게 돨 그 시대에 여운형에게는 친일파 척결이 급선무였는가?

해방 전에는 친일 부역을 하고 해방 후에는 친일 부역자 척결을 외쳤던 여운형씨에게 좌익 합작 논리는 무엇인가? 이승만 박사는 억울하게 전범 누명을 쓴 동포들을 구명하자고 했고, 좌익 진영에서는 냉소하였다. 여기서 좌우합작 논리가 가능할 수 있는가? 전범 누명을 쓴 동포들을 구명하든가 말든가 단 하나의 선택이 있을 뿐이지 그 중간 선택은 불가능하였다. 연합국 군검사들에게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며 강제로 끌려갔을 뿐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친일파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중간 선택점은 있을 수 없었다.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 친일파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전범재판시 무죄와 B급 전범을 가름하는 연합국 군검사들의 기준은 단 하나 자의냐 타의냐였다. 그래서 마루타 생체실험부대 일본군 장성은 타의에 의한 복무였다는 이유로 무죄가 되고, 남양군도 조선인 근로자들은 자의로 친일 부역했다는 이유로 B급 전범이 되었다. 이렇듯,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까지 친일파라는 용어를 확대 사용할 경우 엄청난 논리적 비약의 문제가 생긴다.

일제 시대에 이광수와 여운형이 똑같이 일제 말기에 일본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을진대 이광수는 친일파로 단죄하고, 여운형은 항일운동가로 서훈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실제에 있어, 여운형씨가 일본군과 싸운 적은 없으나, 동포를 상대로 친일파 척결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항일운동가로 알려졌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의 항일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1912년 중국 신해혁명 직후 한족 군벌들이 만주를 침략하여 동만주와 북만주와 만주로 분할 통치하였는데, 장군님으로 불리던 한족 군벌들은 국민당이란 중앙정부와의 관계는 이름뿐의 관계였고,사실상 권력을 세습하는 국왕 혹은 절대 군주의 위치에 있었다. 이것이 어려서부터 만주에서 자란 가짜 김일성이 아는 유일한 국가 모델이었고, 훗날 북한 주석이 된 후에 그 모델, 그 체제를 그대로 북한 통치에 적용하였다.

1931년에 만주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이러하다. 자, 김대중이 대통령 재임기간중 1억불을 스위스은행 비밀계좌에 입금하였는데, 거기까지는 국민이 이해해도 만약 대통령이 개인 사업에 손대면 국민 감정을 자극할 것이다. 만약 일제 시대 조선총독이 공직자의 몸으로 백화점을 직접 운영했다면 번일 감정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만주에서 한족 군벌들간에 있었다. 그들은 절대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이면서도 큰 사업 상권을 장악해 나갔기에 만주족의 독립운동을 자극하였다.

관동군도 국가간의 계약에 의해 자유항 관동주와 만주철도 수비를 하고 있었으나, 현대 무기 등 한족 군벌이 원하는 것들을 댓가로 주고 주둔하고 있었다. 한족 군벌은 그 무기로 무장하고 만주족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1929년 후반부터 한족 군벌들이 일본이 러일전쟁 후 러시아로부터 승계한 만주철도 부설권 등을 빼앗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항 관동주 99년 조차권마저 관동주와 협의 없이 영국 등 서구국가들에 넘기려 시도하였기에 생긴 앙금과 러시아군의 남하 그리고 무장 한족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만주족의 노력 등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그 이듬해 만주족이 만주족으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모셔 독립선언을 한다.

만주에서 항일이란 말은 누가 사용하였는가? 만주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지배하였던 무장 한족이었다. 중일전쟁은 1937년에 시작되었는데, 왜 만주족이 1932년에 독립하여 완성되어 1934년 만주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정하였으며, 신국적법이 무장 한족의 옛국적을 인정않던 시기에 항일이란 용어가 등장하였는가? 만죽국 독립 이전에는 관동군으로부터 현대 무기를 받아서 만주족을 무력 통치하였던 무장 한족이 갑자기 항일이란 말을 사용하였을 때 그들은 만주국 침략, 특히 만주국 거주 조선족 약탈을 항일이란 뜻으로 사용했었다.

자, 여기서 한족 군벌과 조선족의 관계를 설명해 보자. 1912년부터 만주를 한족 군벌이 통치하자 한족 군벌과 일본 정부 사이에 만주의 200만명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각에 마찰이 생긴다. 사실, 일본인들은 면세 지역인 자유항 관동주에몰려 있었음에도 조선족의 번창을 일본의 만주 침략이라는 의혹의 눈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만주를 통치한 한족 군벌은 조선족이 무국적자라는 구실로 조선족 토지를 합법적으로 몰수하는 법을 제정하고 여러차례 시행하려고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유항 관동주 일본계 관리들은 만주의 조선족도 일본 시민권자들이라며 조선족 국적을 보호하여 한족 군벌이 조선족 토지를 법으로 몰수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1932년 만주족이 독립하여 건국한 만주국이 조선족에 만주국 국적을 부여하는반면에 무장 한족의 옛국적을 무효시키자 무장 한족은 그때부터 무력으로 조선족 토지 약탈을 시도했으며, 조선족 재산 약탈이 항일이라는 공산당 마적단의 논리는 여기서 출발하였다.

만주의 무장한족을 공식명으로 동북군이라고 불렀는데, 만주국이 건국되자 동북군 중 일부는 부의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새국적법에 따른 만주국 국민의 자격으로 훗날 만주국군 창군 요원이 되었으나, 일부는 군벌 쟝쉐량을 따라 국민당 국기를 군기로 정하고 명색이나마 국민당 소속군이 되었으며, 나머지 일부는 무력으로 조선족 토지를 빼앗기 위해 공산당 군대를 형성하였는데, 만주에서 한족 군벌이 만주의 조선족 약탈을 목적으로 1935년에 동북인민혁명군이란 이름으로 구성한 이 군대가 바로 동북인민혁명군이란 이름의 마적단이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당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처럼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단지 조선족 민가 습격이 생계 유지 수단이었을 뿐이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지주의 토지와 사업가의 재산을 모두 몰수할 수 있다는 사탕발림이 당시 무장 한족들로 하여금 쉽게 공산당에 가입하게 한 동기부여였다. 동북인민혁명군이 하는 일이 바로 다름아닌 조선족을 주적으로 간주한 군대였는데, 조선족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 아니다. 조선족에도 만주족에도 공산당 적군의 침략을 막교 조국을 지키기 위한 의병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들 역시 훗날 만주국 국군 창군요원이 된다. 만주국 조선족 사이에도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동북인민혁명군의 정강정책이 오늘날 중국이 시도하고 하는 동북공정, 즉 한반도는 중국역사의 일부라는 논리의 출발점이었다. 그들의 정강정책 어디에도 조선독립운동이라는 말은 없다. 우선 제 1항에 동북에서 만주국의 통치를 전복한다는 것이요, 9항은 中 , 韓 , 蒙의 피압박민족은 밀접히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만주정부를 타도한다는 것일 뿐, 정강정책 그 어디에도 중국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연대하던가 한다는 내용이 단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티베트인들이 항일연군이란 말에 속았다가 중국인들에게 국토을 영영 빼앗기고도 여태껏 국제사회에서 하소연할 논리가 약한 것은 항일연군에 참여한 티베트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조선인들 중에도 동북인민혁명군에 속아넘어간 자들이 있었다. 1935년에는 동북인민혁명군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한인들로 구성되어있었음에도 한인공산주이자들의 항일무장투쟁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해 싸워야 하며(제 7항), 민족혁명전쟁에 대해 중공당의 지도를 받고 옹호해야 된다(제 8항)고 하여 중국 공산당의 용병노릇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명시되어 있다.

더욱이 민생단사건으로 인해 동북인민혁명군 내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반공주의자로 오인 받아 아무 죄도 없이 400명이나 학살당했다. 이것은 민족주체성의 확립은 물론 한국의 독립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중국공산주의운동일 따름이다. 보라, 동북인민혁명군이 조선족을 주적으로 삼았는데 어찌 조선족에 반공주의자가 한 명도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동북인민혁명군은 자기네에게 충성한 한인공산주의자들마저 반공주의자들로 몰아 숙청하였으니 이른바 민생단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그럴듯한 정치적 이유로 숙청이 시작되었지만, 일단 숙청이 가속화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밥을 흘려도 민생단(어렵게 구한 식량을 허비하니까), 밥을 설구거나 태워도 민생단, 밥을 물에 말아 먹어도 민생단(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은 전투력을 약화시키니까), 배탈이 나거나 두통을 호소해도 민생단, 사람들 앞에서 한숨을 쉬어도 민생단(혁명의 장래에 불안감을 조장하니까), 설사를 해도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고 말해도 민생단(민족주의와 향수를 조장하니까), 일이 어렵다고 불평해도 민생단, 일을 너무 열심히 해도 민생단(정체를 감추려고 일을 열심히 한 것이니까), 일제의 감옥에서 처형되지 않고 살아돌아와도 민생단, 오발을 해도 민생단, 가족 중에 민생단 혐의자가 나와도 민생단, 민생단 혐의자와 사랑에 빠져도 민생단, 옷을 허름하게 입어도 민생단으로 몰리는 등 무고한 사람들을 일제의 간첩으로 모는 꼬투리는 끝이 없었다.

그럴진대, 과연 KBS는 동북인민혁명군이 이렇게 우리 동포들을 죽인 것을, 일제시대 전기간에 걸쳐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한 분들의 수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반해 이렇게 동북인민혁명군이 우리 동포들을 마구 학살한 것을 조선독립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이것이 KBS 드라마1945에서 문동기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서 행한 일이었다는 말인가? 어째서 그것을 조선독립운동으로 미화해 방송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동북인민혁명군이 행한 조선족 학살을 기억하는 중국인들이 그 드라마를 본다면 뭐라고 손가락질 할 것인가?

1935년에는 조선인이 대부분이었던 동북인민혁명군이 그 다음해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명되면서 한족의 숫자가 늘어나는데, 1936년 시안사건 때문이었다.

1936년의 모택동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그리고, 동북군을 거느리던 군벌 쟝쉐량은 분명 국민당 정부 신하였으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제석 총통이 쟝쉐량에게 모택동 군대를 공격하라고 권유하기 한발 앞서서 모택동이 사탕발림을 한듯하다. 아마 그 사탕발림은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한족이 다시 만주족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쟝쉐량은 자기에게 공산당 토벌 군령을 내린 자기 주군 장제석 총통을 체포 감금하였다가 나중에 자신이 국민당 군대에 체포 감금된다. 이후 오갈곳이 없어진 쟝쉐량의 부하들이 더 많이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몰려들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된다.

동북항일연군은 조선족에 대한 시각을 청나라 이후 그리고 만주국 이전의 만주 지배자들이었던 한족 군벌들에게서 승계하였다. 만주국 건국 이후 조선족은 만주국 일등 국민이 되었으며, 국적을 가지고 당당하게 각종 고시에 응시하여 정계 등 각 분야에 진출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만주에는 일본인이 별로 없고 관동주라는 자유항에 몰려있었을 뿐이다. 과동주 거주 일본인들에게는 만주국 국적과 일본국 국적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력이 민주국과 일본국 양편에서 있었던 반면에 조선족에 대하여는 그런 압력이 없어 양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동북항일연군 편에서는 조선족은 일본의 앞잡이요, 조선족의 번창과 사회적 지위 향상이 일본 경제의 만주 침투라고 주장할 근거였다.

동북항일연군이 일본군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관동군은 저 멀리 북쪽 만소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러시아군 만소국경 침범을 막고 있었는데, 동북항일연군이 북편으로 이동하여 군사작전을 벌인 일이 있었는가? 관동군이 팔로군 토벌에 나선 것은 1939년 중일전쟁이 한창이었을 무렵 그 기회를 타 러시아군이 남침을 시도하려 하였을 때 소만국경으로 집결할 시기였다. 그 시기에 관동군이 만 명에서 70만명으로 증강되어 러시아의 남침에 대비하면서 만주국 동맹국으로서 만주 침략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러시아군이 만소 국경지대로 집결한 틈을 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략하였으므로 스탈린의 만주와 한반도 재침략 계획은 1945년 8월로 6년 연기되었다.

관동군이 소만국경을 수비한 것을 침략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1904년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 침략을 시도하였을 때 이미 만주를 점령하였었는데,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자로 만주족의 국토를 되찾아주었던 것이며, 러일전쟁의 패자 러시아가 다시 20년간 군사력을 키워 재침략을 시도하던 1932년 만주 의병들이 스스로 막다가 국경이 다 뚫린 후에 뒤늦게 관동군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관동군이 입은 피해와 타격이 컸기에 소만 국경은 관동군에 맡기고, 만주국군은 중국공산당의 침략 방어에만 전념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되어 만주국 군주 부의가 관동군에 만소국경 주둔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만주국의 독립과 시안사건으로 만주에서도 국민당 정부로부터도 국적과 소속을 상실한 무장 한족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의 본 모습은 마적단이었다. 그러나, 같은 한족이나 만주의 본주인 만주족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이 일본침략의 앞잡이라는 논리로 조선족을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 무국적 무소속 동북항일연군은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민가를 수시로 급습하여 재물과 곡식을 약탈하는 마적단이었던 바 조선족 민가 약탈로 군수품을 조달하였던 것이다.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보천보전투도 물자보급의 일환으로 동포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한 패악무도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동북항일연군은 항일이란 명분으로, 공산주의 혁명이란 명분으로 조선족 민가를 습격하였으며, 만주국 시민이었던 조선족 보호를 위해 출동한 만주국 경찰과 한두번 교전했다 하여 조선독립전쟁이라 미화할 수 없다. 마적단에 시시때때로 약탈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경찰마저 외면해야 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만주국 경찰의 자국 국민 보호를 일본 침략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이 타당한가?

동북항일연군은 국제정치학적 시각에서 보아도 독립군으로 간주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임시정부 광복군의 동맹군은 장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군이었다. 그런데 동북항일연군은 국민당 정부군을 적군으로 간주하였다. (해방되자마자 여운형의 건준이 어째서 상해임정의 귀국을 불허하였는가? 그것은 건준이 세우려는 나라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으려는 나라요,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적국 상해임정을 적국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국민당 정부의 우방 상해임정을 적국으로, 국민당 정부군의 동맹군 광복군을 적국으로 간주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주적이 광복군이었다. 일시적 국공합작? 그러나 여운형의 좌우합작 논리가 그러하였듯이 일시적 국공합작이 중국 공산화 전략이었으며, 장제석 총통은 공산당 전술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티베트는 온전한 독립국이었음에도 중국공산당이 연군을 조직하자고 하더니 아예 티베트 전 국토를 삼켜버렸다. 오늘날 중국 발전의 원동력도 만주의 산업과 자원에 있을진대 만주국이 독립국으로 남아 조선족이 주인노릇하는 것이 조선족에도 좋고, 우리 민족에도 좋은 일이거늘 도대체 중국공산당에 갖다 바치는 것이 어째서 조선독립운동이란 말인가? 티베트인들은 국토를 영영 빼앗겼으며, 조선족은 점차로 소멸되어가고 있으며, 동북항일연군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구실로 한반도 역사까지 지금 저들의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지 아니한가.

해방 후에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실, 우리 민족 독립을 가능하게 한 이는 1943년 11월 6일 카이로 회담 때 조선독립론을 주장한 장제석 총통이었다. 그런데,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만주의 조선족은 은혜를 악으로 갚았다. 국민당은 만주를 공산군에 빼앗겼을 때 산업자원과 산업에서 모택동에 열세가 되었다. 그런데,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를 추방하고 모택동 군대를 불러들인 이들은 다름아닌 조선족이었다. 본래 만주족은 반공시민들이었으며, 한족 군벌도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반공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나, 조선족이 공산군이 앞잡이가 되어 만주가 모택동 손에 넘어가게 하였다.

모택동은 그 공을 악으로 갚아 한국전쟁 때 조선족을 인해전술 의용군이 되게 하여 그들 선조의 조국을 침략하게 하였던 것이다. 간사한 모택동이 한족을 인해전술에 동원하지 않았다. 바로 만주의 조선족을 인해전술 의용군에 동원하여 일주일분 미수가루만 주고 돌격하라 하였다. 살아돌아올 생각 하지 말고 자기 동포를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만약 조선인들만 동북항일연군에 속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과 동질성이 있는 만주족과 조선족으로 구성된 만주국은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였을 것이요, 중국과 한반도, 러시아와 한반도 사이에서 만주국이 완충국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만주의 무진장한 자원을 우리 민족이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택동에게 만주를 갖다바쳐서 조선 독립에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만약 의용군으로 동원할 조선족이 없었으면 중공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요, 우리 민족은 통일되었을 것이다.

만약 1943년 11월 6일 카이로 회담 때 쟝제석 총통이 우리 민족 독립을 위해 대미 외교를 벌여야 할 유일한 근거는 국민당 정부군의 동맹군이 광복군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의 판단에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수가 광복군 수보다 많다고 판단하였으며 조선 독립론을 루즈벨트 대통령께 설득하였을리 있는가? 동북항일연군 내에 조선인 수가 조금만 더 많았어도 우리 민족은 영영 해방과 독립을 맞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외교적으로 조선독립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동북항일연군을 독립군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KBS 에 묻는다. KBS드라마 서울1945 는 문동기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이었으므로 항일운동가요, 반공주의자는 친일파라는 논리 구도로 줄거리가 전개된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반공주의가 있었는가? 반공주의는 해방 후에 나타났다. 함흥 등 러시아군이 진군한 지역에서 붉은완장찬 무리들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했던 애국동포들을 색출하여 도끼로 때려죽이니깐 부모와 재산을 잃은 자녀들이 월남하여 반공 활동을 한 것이 시초였다. 따라서 반공을 친일로 묘사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조국을 지키기 위해 순군한 용사들에게 모욕이 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KBS측이 시청자들에게 조선족 약탈을 항일이란 뜻으로 사용했던 동북항일연군이란 마적단이 어째서 독립군이라는 것인지 밝혀줄 것을 희망한다.

우리가 KBS 측에 문동기가 항일운동한 근거를 보여줄 것을 요구해야만 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로, 한류 열풍을 타고 중국에서 이 드라마를 볼 경우 영락없이 중국의 동북공정논리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만약 문동기가 조국 해방의 영웅이라면 그 공은 자연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게 된다. 역사 기록상 동북항일연군내 조선인은 모두 하급 졸개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외국노동자가 자기가 한국 기업주라고 떠들고 다니면 웃음거리밖에 안되는 것이다.

둘째로, 일본인이 이 드라마를 보면 한일합방 문서는 조선인 친일파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할 자료가 된다. 친일파 척결은 자의성을 강조하기에 해방직후의 섣부른 그 논리가 동경재판 때도 일본 전범은 무죄, 한국인 강제징용자는 유죄 판결을 받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럴진대, 일본에 한일합방 문서는 역사 논리로는 유효하다고 주장할 근거를 주어서 무엇이 득이 된다는 말인가? 실제로, KBS드라마 서울1945는 중국과 일본 양편에 역사 논리로 우리나라를 침략할 근거를 주고 있다.


영어공부 동영상


미국이 임정 대표 이승만 박사의 요구대로 한일합방 문서를 무효화시키는 방법은 일본으로부터 무조건항복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는데요. 지금

태평양전쟁 2편/ 일본에 무조건항복을 요구하는 루즈벨트
를 클릭하시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에 무조건항복을 요구하는 장면을 기록영화로 보실 수 있습니다.


피습당하시는 박근혜 대표 동영상과 슬라이드



* 사진설명: 광복군의 전투훈련 장면. 민족주의 계열(우익) 독립군 은 민족주체성을 견지함은 물론 한국의 독립을 앞세웠으며, 민폐를 끼치는 행위를 일체하지 않았다. 애국계몽운동도, 3.1운동도, 6.10만세운동도, 청산리대첩도, 봉오동 전투도, 상해 임시정부의 정강정책도, 한결같이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광복군 외에 북로군정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이범윤, 김성륜 등의 대한광복단도 모두 민족주의(우익) 진영의 독립군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용병노릇이었던 마적단을 제외하면 독립군이 한명도 없었다.


* 사진설명: 중국공산당 지시를 받고 재미동포들에게 빌려 한복을 빌려입고 중국공산당 주석을 열렬히 환영하는 조선족. 이는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착각을 외국인들에게 주려는 노림수였던바, 이 장면이 미국전역에 방영되자 한국인과 조선족을 구별할 줄 모르는 미국인들은 왜 한국인이 중국공산당 주석을 환영하느냐고 의아해하였다. 만약 조선족이 동북항일연군에 이용당하지 않았더라면 2차대전 종전 후 만주국은 조선족이 주인노릇하는 온전한 독립국이 되었을 것인데, 괜히 모택동에게 만주를 통째로 갖다 바치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마저 상실당한 채 중국공산당에게 지배당하게 한 것이 어째서 조선독립운동이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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