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괴담의 진실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념적 정체성
정의구현사제단과 월남의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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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월남의 패망

    518측에서 감추는 518광주폭동 발단의 원인이 바로 "박관현 사망설"이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광주경찰이 죽였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광주의 파출서들을 파괴하고, 순경들을 인질로 납치하는 등의 어이없는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날 1980년 5월 18일 오전 8시 반에 윤상원은 박관현을 광주 외곽에 보내고 불과 5시간 만에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광주사태는 그런 유언비어가 빚어낸 불행한 사태였을 뿐 전혀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

  광주폭동은 작금의 광우병 괴담 폭동과 그 전개 양상이 유사하였던바, 그 주동자들은 그들의 목적이 공산주의 혁명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정로의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 (cafe.daum.net/518cafe/8yGb/72 )
과 박노해의 윤상원 평전 (cafe.daum.net/518cafe/8yGb/59)을 읽어보라.  그들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고3학생 진우로 둔갑되고, 윤상원(민우)의 동생으로 둔갑되나 실제 역사에서 박관현은 광주사태 때 광주에서 거주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째서 윤상원은 "박관현 사망설"을 퍼뜨렸으며, 이 설이 빚어낸 폭동으로 순경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광주향토사단이 7공수 2개 대대를 동원하였을 때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까지 등장하게 된 것일까?

   그 실마리는 윤상원이 배후에 있었던 부마사태에서 찾을 수 있다.   부마사태의 배후는 광주사람 윤상원이었으며, 윤상원이 노동운동의 명분으로 부산 YH여공들에게 접근하여 한 여공이 자살하자 촉발된 부마사태가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격에 시해되는 10.26사태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부마사태를 선동한 유인물은 용공단체 남민전이 뿌린 것이었는데, 바로 그 남민전의 몇몇 주요인물들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이었다.  

   김대중 역시 부마사태와 광주사태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1980년 봄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 음모를 진행시킬 무렵 그는 "10·26이 없었다면 10월29일엔 광주에서 터지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렇게 되면 일사천리로 북상했을 겁니다"라는 말을 한바 있다.  광주사태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김대중은 1979년에 이미 광주사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마사태 선동의 경력으로 윤상원이 1980년 봄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작금의 광우병 괴담 폭동의 본질은 제2의 광주사태이다.  지난 6월 1일 한총련 사이트에 김대중의 명의로 뜬 글의 문구를 유심히 살펴보라:  

5.18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 민족에 혁명을 일으킬때다

학생들이여

이제는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옛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우리 선배들이 들었던 화염병과 쇠파이푸, 돌을 다시 집어던저라

이명박 하야를 외치며 청와대로 달려가자 (cafe.daum.net/issue21/3Fdk/2785 ).

   1980년 봄 김대중이 광주사태(본래는 전국적 민중봉기) 선동할 때 제2의 동학혁명, 제2의 4.19가 일어나야 한다며 유혈폭동을 선동했던 것과 문체가 유사함에 유의하라.  아직 전경의 진압이 시작되기도 전에  쇠파이푸 사용 계획이 있었다.  혁명 계획은 이미 지난 4월 이전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들의 분명한 목표는 연방제 통일이다. (cafe.daum.net/issue21/3Fdk/2812).  좌익이 말하는 혁명은 쇠고기 재협상이 아니라, 연방제 적화통일 여건 조성이다.

  그러면 왜 광주사태 때는 전국의 도청을 점령하려 했으며, 지금은 청와대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일까?  본래 1980년 5월의 광주시민군이 1975년 3월 월남 중부 지방의 시민군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월맹군이 전선을 넘는 남침으로는 경제력이 20배나 강하고, 군사력이 10배나 강한 월남을 도저히 점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월남 중부 지방에 시민군을 창군하고, 그 시민군이 수도 사이공을 향하여 치고 올라와 4월 30일 대통령궁을 정문을 탱크로 밀어내고 대통령을 인질로 잡으니 그날로 월남군이 해산되고, 월맹군 주도 하에 연방제 적화통일이 실현된 것이었다.

  광주사태 때도 광주시민군이 열차를 징발하여 서울로 치고 올라가려 했었으며, 그것이 그들이 5월 20일 그토록 버스로 순경과 군인들을 깔아죽이려 하면서까지 (실제로 여러 명 깔아죽였음) 광주역을 점령하려 하였던 이유였다.  윤상원이 계획한 광주사태는 본래는 전국적 민중봉기였음을 보여주는 문건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가 제작한 5월 22일자의 투사회보이다.

광주시민군이 서울을 향하여 치고 올라가려 했음을 시사하는 문건

위 투사회보 원본 다운로드

   위 문건에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관찰한다:  "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21일 장성, 화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 탈취", "전라북도에서도", "전주도청 완전히 장악", "KBS방송국을 접수하여 각지에 방송을 통해",
"외곽도로차단 (서울 목포 화순, 송정, 남평 기타)", "인근지역에 나가 투사를 규합하자."

   이런 문건을 본 적이 없는 탈북자들이 광주시민군을 봉기군이라 칭한다.  김대중은 전국적 민중봉기가 성공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전복되면 5월 22일 직접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내각을 임명하고자 예비내각 명단까지 짜놓고 있었다.  지금, 또 김대중이 "직접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이명박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선거 없이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것이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민주주의는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는 정치인데, 광주사태는 --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는 -- 선거없이 정권을 교체하려 하였던 까닭이다.

   518무장시위대가 5월 21일 전남도청과 전북도청을 감제 점거하였을 때의 광경을 보여주는 아래 사진을 보라.  

  

   폭도들이 도청을 강제 점거한 것은 절대로 민주화 운동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됨에도 역사가 잘못 기록되어 있다.  지금 광우병 괴담 폭도들은 518폭도들이 전라도 각 도의 도청을 강제 점거하였던 것이  5.18민주항쟁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승격시켜 주었기에 퇴임 4년 만에 내란 주동자로 몰렸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5월 18일 518행사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지금 광우병 괴담 폭도들로부터 청와대가 습격당하는 수세에 몰려있다.  시위 배후가 "이명박 하야를 외치며 청와대로 달려가자"고 선동할 때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라는 지령이다.

   1975년 4월 30일 시민군의 탈을 쓴 월맹군이 사이공의 대통령 궁을 습격하기 직전까지도 월남국민 당사자들은 태평했었다.  월남국민은 10배나 군사강대국인 월남이 총 한 방 제대로 쏘지 못하고 항복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당시 월남의 천주교 지도자들과 불교 지도자들이 시민군의 탈을 쓴 월맹군의 침략을 가리켜 민주화운동 시위라고 대국민 발표를 하였으며, 오늘날 한국의 KBS와 MBC처럼 월남의 좌익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2008년 한국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과 유사한 단체가 1975년 월남 천주교의「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이었다.  물론,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은 정의구현사제단처럼 민노당 2중대였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정치적이었으며, 좌익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짠후탄 신부의 경우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되 좌익에 속아 시국읽기를 잘못하고 좌익에 이용당하는 종교지도자였다.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받던 짠후탄 신부가 월남 중부전선의 전투는 월맹군의 침략이 아니라, 민중의 봉기라고 대국민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멍청한 판단과 억지는 자신도 처형됨은 물론 자신을 추종하던 친북 좌파와 그가 어둠으로 인도하던 신자들을 포함하여 900만명이나 학살되게 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심지어 월남의 통일운동가들도 모조리 체포되어 처형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빨갱이들의 주장이다. 그 외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까지 합하면 적화통일 직후 살해 당한 사람들의 수가 무려 9백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목숨 걸고 탈출한 보트 피플의 수가 106만명이었다.

  무엇이 짠후탄 신부의 실수였던가?  안보 위기를 경각시켜야 할 그가 월맹은 남침의 의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5년 1월8일에 월맹군은 18개 사단 총병력을 남침을 위해 휴전선 일대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975년 3월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대선을 몇 달 앞두고 레임덕에 빠져 있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그제서야 거짓 평화의 환상이 깨졌음을 알아차리고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 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1973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한 월맹의 속셈은「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5년 3월 월맹의 중부에서 발생하였던 이 민중 봉기는 그로부터 5년 후 김대중이 진행시킨 음모 "전국적 민중봉기"와 정황상 상당히 닮은 꼴이다.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는 인민군 전투 요원들이 이미 침투해 있었다고 탈북자들이 이구 동성으로 증언하는 까닭이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목격한 광주시민군

   외형상 시민군의 민중 봉기요, 그 본질은 월맹의 남침인 중부 전선 전투에서 공산당 세력이 3월 26일 다낭을 함락하자 그때부터 휴전선 일대의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마침내 4월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2008년 6~7월의 한국 정세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월남 좌익은 반공주의자 티우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지금 김대중이 선동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형식으로 정반민을 취임시킨지 9일 만에 연방제 명분으로 항복을 받아낸 것이었다.  월맹보다 20배의 경제력과 10배의 군사력을 갖춘 자유월남이 이렇게 어이없게 허물어질 줄 월남 국민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으나 어느날 갑자기 그런 비극이 닥쳤다.

    짠후탄 신부는 월맹군에 체포되고 나서야 그 군대가 시민군이 아니라, 월맹군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월맹의 입장에서는 월남군을 무력화시키고 미군 파병의 명분마저 없앴던 짠후탄 신부는 월맹군에 무혈 승리를 가져다 준 자였지만 그도 개조캠프라는 형무소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짠후탄 신부는 성직자였던가?  정세 분별력이 없었던 그가 정치에 깊숙히 개입한 결과 엄청난 대학살극이 벌어지는 적화 통일을 초래하였다.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 짠후탄 신부는 국민을 구국 평화의 길이 아니라 망국 재난의 길로 인도하던 지도자였다.

  월남의 짠후탄 신부가 월맹군의 남침을 월남 민중의 봉기라고 우김으로 월남의 패망을 가속화시켰던 바로 그해 1975년에 한국에서 민중신학이 출발하였다.  한국에 강성 노조가 등장하게 한 민중신학은 무수한 기업들을 줄줄이 도산시킨 도시산업선교회와 더불어 출발하였으며, 바로 이 도시산업선교회가 1996년 민주노총으로 명칭과 모습을 바꾸고, 민주노총이 민노당의 시작이었으니, 역시 민중신학에 뿌리를 둔 정의구현사제단은 실상 민노당 2중대인 셈이다.

   우리가 신학적으로도 정의구현사제단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론 바탕을 둔 그들의 세계관은 기독교의 진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은 계급 투쟁론의 시각에서 해석하기에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하게 해석한다.  어째서 문정현 신부를 필두로 정의구현사제단이 주한미군철수운동을 전개해 왔는가?  그들의 눈은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론으로 멀어있기 때문이다.  지금 광화문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시위를 벌이고 있단다.  그것이 종교인들의 종교행사인가?  아니다, 천주교 성직자의 탈을 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친김정일 정치활동일 뿐이다.

   월남의 성직자 짠후탄 신부가 월맹군의 남침을 월남 민중의 봉기라고 주장하는 시위 선봉에 섰을 때 월남은 남남분열되어 찢어졌으며, 적화통일세력의 침략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월남사회가 둘로 찢어졌을 때 자유월남은 패망하였으며, 그후 30년이 지나도록 종교의 자유는커녕 선교의 자유조차 없는 나라가 되었다.  도대체 지금 정의구현사제단은 어느 편에 서있는가?  진정한 천주교 사제들이라면 마땅히 적화통일세력과 맞싸워야 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정녕 월남 카톨릭의 최고 지도자 짠후탄 신부가 1975년 4월 월남에서 범했던 그 과오를 2008년 7월의 한국에서 되풀이하려는 것인가?

   ☞ 다큐멘터리 동영상/ 사이곤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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