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괴담의 진실

광주사태와 광우사태
광주사태와 광우사태의 시위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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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와 광우사태의 시위구호 비교연구

   7월 5일자(2008년) CNN 뉴스는 한국의 광우사태가 MBC PD 수첩의 조작, 왜곡, 과장 보도에 의해 조장된 것임을 방송하였으며, 이로써 한국의 공영방송이 세계인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광우병 괴담은 요란하였으며, 광우병 폭력시위대의 수가 수만에서 수십 만에 이르렀으나, 그 시위대 개개인은 광우병 연구 전문가도 아니요, 미국 쇠고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바로 그런 예가 광주사태 때도 있었다.  광주시민군 중 99.9999 퍼센트가 넘는 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 죽여라!"는 그들의 구호는 우렁찼으나, 그들은 전두환이 광주시청 공무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1979년 12월 제 10대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
cafe.daum.net/issue21/3MNI/122
)

   미개인들과 역사치매증 환자들과 518픽션소설가들이 어찌나 사기를 쳤던지 신세대 중에는 광주사태 당시 대통령이 전두환이었으며,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광주사태가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러나, 광주사태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며, 광주사태 당시는 아직 국민이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을 때였다.  전두환은 광주사태 이후 1980년 6월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었을지언정, 그 이전에는 국민이 그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1979년 12월 21일 제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시는 최규하 대통령을 본다.  최규하 정부는 개헌의 사명을 위해 탄생한 정부였으며, 연내 개헌을 마무리하고 이듬해 초에 직선제로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로드맵을 취임사에서 발표하셨다.  그래서 최규하 정부를 과도기 정부라 부르며,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과 더불어 전국은 5공화국 대통령 선출을 위한 대선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최 대통령 역시 아주 완벽한 개헌을 해 보시려는 야심에 들떠 계셨다.  


(1980년 1월 18일 최규하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cafe.daum.net/issue21/3MNI/121
)

   그리고, 1980년 1월 18일 최규하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이 회견에서 최 대통령은 4공화국 시대를 접고 5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의 개헌 의지를 다시금 강조하셨다.  -"나는 이번 기회가 우리나라의 현실과 과제에 맞고 지속성이 있는 훌륭한 헌법을 만들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믿으며, 이번 개헌은 국민의사의 최대공약수가 집약되어야 한다."  -"정부는 헌법 연구반을 구성해서 실무 수준에서의 학문적, 실제적인면에서  연구와 검토에 착수, 연구반은 헌정사를 면밀히 검토, 각국의 헌법도 장.단점을 비교 연구하는 등 작업을 할 것이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중앙부처 연두순시
cafe.daum.net/issue21/3MNI/120


   며칠후 최규하 대통령 중앙부처 연두순시가 있었는데, 이때도 28년후의 지금처럼 한국이 고유가 에너지 위기를 당면한 때였다.  고유가 에너지 위기가 장기화될 것을 내다보신 최규하 대통령은 연초부터 대책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셨다.

  
(1980년 최규하 대통령 연두순시
cafe.daum.net/issue21/3MNI/119


   2월에도 최규하 대통령 연두순시는 이어졌는데, 외무부 순시중 최 대통령은 "금년은 세계적인 경제난에 대비해서 자원확보, 수출시장의 개척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하신 후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 모든 외교역량을 집중하라"고 지시하셨다.


(1980년 봄이오는길목, 국정자문회의 첫 모임
cafe.daum.net/issue21/3MNI/118


   3월 희망의 봄이 왔으며, 국정자문회의 첫 모임이 열렸다.  이날 최규하 대통령의 말씀 중에서 키워드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였다.  "정부는 이중 삼중의 도전과 시련을 극복하고 나아가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이룩해 나가기 위하여 국가의 안전보장을 튼튼히 하고 질서유지를 통한 사회안정을 기하여 민생안정과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서 질서정연하고 착실한 정치발전을 추진해 나가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라고 최 대통령이 말하셨다.

   그러면 저 미개인들과 역사치매증 환자들과 518픽션소설가들이 사기치는 것처럼 최규하 대통령이 군사독재자였거나 그 시대가 군사독재시대였는가?  아니다.  그러면, 김대중이 쥐꼬리만큼이라도 민주화운동을 한 적이 있었는가?  누가 신민당 대선후보가 될 것이냐 문제 가지고 그달 3월 김영삼씨 지지자들과 김대중씨 지지자들이 난투극을 벌였는데, 그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아니다.

   4월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자기가 무슨 한국의 모택동이라고 김대중이 일단의 교수들을 어용교수로 몰아 홍위병들을 동원하여 강제 퇴진시켰다.
여당 없는 정부였던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학계의 자문도 필요했는데, 직선제 개헌안을 발의하던 최 대통령을 옹호하던 학자들이 어용교수로 몰려 퇴진되었다.  "4월 학내 시위"란 전국 각 대학교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검하고 책상과 걸상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좌익과 성향이 다른 교수들을 강제로 퇴진시켰다.  홍위병들이 그런 식으로 학자들의 발언권을 막는 것이 민주화운동인가?

   5월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고유가 행진에 돈을 주고도 원유를 수입할 수 없는 경제위기가 닥쳐 최규하 대통령은 중동순방길에 오르셨다.  그 당시 에너지 위기의 유일한 탈로는 외교관 출신 최규하 대통령의 석유 외교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마음은 무거웠으니 김대중이 너무도 거세게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광주사태든 광우사태든 김대중이 배후 선동하는 폭력시위의 특징은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노무현이 여러해 걸쳐 한미FTA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후임 대통령이 재협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김대중은 잘 안다.  그리고, "쇠고기 재협상"과 "이명박 물러가라"를 외치는데, 이 둘 모두 이명박 정부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사항이다.

   하루속히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여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최규하 정부더러 개헌을 하지 말라는 것도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 내각더러 5월 19일까지 퇴진하라는 것도 도저히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사항이었다.  아직 소속 정당조차 없었던 김대중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대통령과 내각에 퇴진을 요구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순방길에 오르자마자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하였기에 최 대통령이 중동순방 일정을 단축하고 귀국하여 5월 18일 자정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지금도 김대중 일당이 이명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할 때 수용하든가 저항하든가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듯이 그때도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다.



5월 11일자 조선일보.  김대중이 어찌나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를 선동했던지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공청회마저 취소하였다.



   바로 윗 동영상에서 보듯이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는 막을 수 있었으나,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은 사전에 막지 못했다.  미개인들과 역사치매증 환자들과 518픽션소설가들이 사기치는 것처럼 광주사태가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총장 윤상원 등 주동자 몇몇을 제외한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으며,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 죽이자"고 외쳤을 때 그들은 전두환이 아마도 광주시청 공무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그해 4월 보안사령관 임기가 끝난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서리로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두어줄 작게 실린 적은 있었으나, 0.000001 퍼센트 이하의 국민에게만 그 기사가 눈에 띄었고, 그나마 한자로 작게 실린 무명인사의 이름에 관심 가진 이들은 동교동의 소수를 제외하곤 없었다.)

   모르는 것보다 더 무식한 것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잘못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무식한 것이 잘못된 지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지금 광우사태 시위대가 미국 쇠고기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시위를 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직접민주주의라는 논리가 가능할 것인가?  김대중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것이 직접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가?  광주사태 때도 구호와 실제 사실은 전혀 달랐다.  구호에는 전두환에 대한 증오가 가득하나 전혀 모르는 이, 특히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지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인물을 증오하는 것이 가능한가?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총장 윤상원이 그런 구호들을 내걸기 이전까지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으며, 심지어 그 당시에도 그 모습을 보거나 관련 기사를 신문에서 본 적이 전혀 없었다.  전두환은 광주사태 이후에야 비로서 국민에게 그 이름과 모습이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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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cafe.daum.net/518cafe/IEVu/24
를 클릭하시면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른채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쳤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는 광주시민군 증언들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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