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문학 사진



   지난 2014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의 메츠 말름 위원장은 노벨상 기자회견에서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해 '역사의 상처(historical trauma)와 직면하고 인간 삶의 부서지기 쉬움을 드러낸 시적 산문'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강 작가가 광주사태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어 소설을 썼다는데 있다. 광주사태 가해자가 5·18유공자들이었다는 사실의 한 예가 당시 무장시민들이었던 5·18유공자들이 양민을 납치하여 인민재판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5·18유족회 회장 동생을 처형한 5·18유공자들


   1980년 5월 27일 자신의 남동생 정지영의 실종 신고를 한 정수만씨는 동생 사망 사실을 확인한 후 5·18유족회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5·18유족회 회장이 된 이래 한강 작가처럼 40여년간 국군에 가해자 누명을 씌우는 활동을 해왔었습니다. 아래 정수만씨 서재에 놓여있는 정지영씨 사진은 20대 초반 청년 시절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해 찍은 사진입니다.

20대 초반 청년 시절의 정지영

   정지영씨 사망사건 가해자가 정수만씨와 함께 광주단체 활동을 하였던 5·18유공자들이라는 사실은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지난 2020년 5월 17일에 그가 1980년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찍었던 미공개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지영씨가 두 손을 뒤로 묶인채 무장시민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찍혔을 때 그의 나이 32세였습니다.

5·18유족회 회장 정수만씨 동생 정지영씨를 납치한 시민군

   무장난동자들이 5월 21일 저녁에 도청을 불법 점거하고 광주해방구를 설치한 이래 미국 CIA는 도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있었습니다. 5월 24일 무장시민들이 정지영씨를 납치하여 처형한 바로 다음날 미국 카터 정부의 에드먼드 머스키(Edmond Muskie) 국무장관은 주한미국대사관으로 보내는 전문에서 그 사건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The situation in Kwangju has taken a rather grim turn. The moderate citizens committee has lost control of the situation and the radicals appear to be in charge. Peoples courts have been set up and some executions have taken place. Student demonstrators have been largely replaced by unidentified armed radicals who are talking of setting up a revolutionary government.

한강 13살 때 가족 사진

   5월 24일 도청에서 시민군들이 시민들을 인민재판으로 사형에 처하였다는 위 머스키 장관의 발언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런 문장니다: 광주상황이 악화되었다. 온건파 시민위원회는 상황 통제력을 상실하고 과격파가 도청을 장악하였다. 인민재판소가 설치되고 몇 건의 사형 집행이 실시되었다. 학생 시위대는 혁명정부를 세우겠다고 말하는 정체불명의 무장난동자들로 대체되었다.

CIA 5.18문건

   한강 작가의 5·18소설은 어째서 미국무부·CIA 5·18에 명시된 팩트와 정반대인가요? 5월 26일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 주한미국대사는 광주인민재판에 대하여 이렇게 발언하였습니다: 2. 광주상황: 5월 25일 일요일에 광주사건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민간인들로 구성된 기동순찰대(vigilante group)에 대한 보고가 있으며, 며칠전 반납했던 무기를 난동자들이 도로 가져왔으며, 인민재판과 처형이 있었다. 2. SITUATION IN KWANGJU: DURING THE COURSE OF SUNDAY, MAY 25, EVENTS IN KWANGJU TOOK A SHARP TURN FOR THE WORSE. THERE WERE REPORTS OF VIGILANTE GROUPS, RECOVERY BY RADICALS OF WEAPONS TURNED IN EARLIER, AND EVEN OF PEOPLE'S COURTS AND EXECUTIONS.

북한의 광주사태 선동 삐라

   해남 농민 김인태도 5월 24일 무장시민들에게 납치당한 후 처형당하였습니다.

김인태씨 납치한 5·18유공자들

   해남 농민 김인태씨가 광주인민재판 희생자가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김대중이 1980년 4월에 광주에서, 그리고 5월 11일에 정읍에서 가톨릭농민회 회원 등 농민들에게 월남식 도시게릴라전을 하라는 광주사태 선동 연설을 한 후 해남의 김대중 사조직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5월 19일에 해남 농민들을 광주로 동원하였을 때 김인태씨도 함께 광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김인태 농민은 그저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시키는대로 광주로 가고, 도청광장으로 갔었을 뿐이었는데도 그의 짧고 단정한 두발로 인해 시민군들이 그를 사복경찰관으로 오해하였나 봅니다.

김인태씨를 도청 안으로 끌고가는 시민군들

   광주해방구에서는 학원 전무 김중식씨의 두발이 단정한 것도 죄였나 봅니다. 광주인민재판에 대한 미국무부 5·18문건에서 사용한 단어 execution을 직역하면 이분도 무장시민들에게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김중식씨를 도청 안으로 끌고가는 시민군들

   5·18취재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된 시민군들의 양민 납치 장면은 빙산에 일각입니다.

소년이 온다 주인공 동호가 활동한 도청 안에서 행해진 인민재판

   시민군들한테 매맞으며 허위자백을 강요받다가 쓰러지신 분들 모습이 처참해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해자들은 국군에 광주학살 누명을 씌우고 5·18유공자로 인정받아 충분한 보상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가해자를 뒤바꾸는 소설을 써서 세계인들과 국제사회에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역사인식을 심어주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결코 영예로운 일이 아닙니다.

소년이 온다 주인공 동호가 활동한 도청 안에서 행해진 인민재판

   5·18정신에 광주인민재판 정신 외에 또 무슨 정신이 있는지 아시는 분 계신가요? 무고한 시민들을 납치하여 처형한 시민군들이 가해자였음에도 가해자를 바꾸어 국군에 누명을 씌우는 픽션소설을 쓰는 것이 작가의 양심으로 떳떳한 일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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