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제2장 1화 이태리 영화 '지붕'이 준 충격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고 그의 음성을 다시 내 귀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날 행복하게 했다. 그제서야 나는 만성적 우울증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난 알고 있었다. 다시 시작된 우리의 만남 저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절교 선언이 마치 유효기간이 끝나지 않은 문서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을 나의 열의에 이끌려 다시 잦아진 만남에 기 뻐하면서도 그이는 그때까지도 사랑하는 여자를 가난의 늪으로 끌어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는 신념과 확신을 돌이키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애정과 책임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깊이 방황하는 그이룰 보면서 절망과 야속함 속에 가슴을 태우는 답답한 시간이 홀러갔다. 서로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해 갈등하고 낙심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눈에 띄게 야위어가고 있었다. (이순자 자서전 54페이지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54~55쪽

   "약혼 허락을 하셨다구?"
   갑작스런 나의 방문에 놀라는 그에게 어머니의 말씀을 전하자 더욱 놀 다고 당황해했다. 감사와 경탄 그리고 곤혹스러움이 교차하던 그때 그의 얼굴을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손을 잡고 효창동 이모님 댁으로 달려왔다. 어머니는 이모님과 함께 안방에 앉아 계셨다 두 분 모두 잔뜩 걱정에 찬 표정이었다.
   "순자에게 들으니 도저히 이대로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네를 좀 보자고 했네...." (이순자 자서전 57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56~57쪽

   ‘‘어머님, 어머님 말씀은 정말이지 눈물이 나도록 감사합니다. 늘 저한테 잘해주시는 은혜만도 갚을 길이 없는데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님, 순자에게도 이미 말했지만, 저는 도저히 순자의 행복을 책임질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서로 좋아하고 한때는 저도 과욕을 부려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절대 품어서는 안 되는 생각이라는 것을 이제는 께달았습니다. 어머님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초급장교의 형편으로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앞으로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한 몸뚱이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동안 아버님과 어머님께 받은 은혜만 해도 앞으로 갚올 길이 없는 제가 그런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님 사위될 자격이 없습니다, 어머님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어머니도 물러서지 않으셨댜 (이순자 자서전 58 페이지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58~59쪽

   얼마 후 양가 사이에 의논 말씀이 오간 후 그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한 나들이에 나섰다. 처음으로 시부모되실 어른들을 뵈러 가는 길이라 차림새부터 신경아 쓰였다. 어머니는 양장보다는 한복이 그분 댁 분위 기에 어울릴 것이라며 짧은 감색 통치마에 흰 모시저고리를 준비해주셨고 긴 생머리는 뒤로 넘겨 댕기로 가지런히 묶어주셨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는 길이기는 해도 자꾸만 긴장되었다. 싱글벙글거리는 그이 곁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부터 가슴이 사정없이 뛰어, 가는 길 내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시원스레 펼쳐지던 여름 논밭 풍경과 대구 효성여대 앞 역에서 내려 논둑길을 따라 걸어갈 때 사방에서 요란하게 들리던 개구리 울음소리는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이순자 자서전 60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60~61쪽

   나의 ‘양복마련 비밀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통 약혼식 예복은 친정집에서 마련하는 것이 관례인데도 그런 줄도 모르고 나 혼자 공연히 고민을 한 일이었다. 어쨌든 양복을 내 힘으로 마련해보자는 뜻을 정하고 보니 비용을 마련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혼한 일이지만 그때는 대학생 아르바이트란 것도 없던 시절이라 학생 신분의 나로서는 교통비 책값 커피값 둥의 용돈을 아끼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 청파동에서 이화여대가 있는 신촌까지 꽤 먼 길을 걸어 다녔고, 지출을 줄이기 위해 그이가 외출을 나와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밖으로 나가는 일을 삼갔다. 그 때문에 엉뚱한 오해를 받기도 했는대 그래도 양복 값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리를 한 끝에 가까스로 양복 한 벌 값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순자 자서전 62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62~63쪽

   영화의 첫 장면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서로를 절실히 사랑하는 두 연인의 순결한 결혼식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그러나 곧 장면이 바뀌고 영화는 가난이 어떻게 인간의 사랑과 행복을 그 마지막 가능성까지 완전하게 파괴해버릴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해부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상영 시간 내내 꼼짝도 못하고 앉아, 낡은 방 두 칸에서 아홉 식구가 등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기막힌 가난의 현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부부이면서도 함께 있유 공간을 찾기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눈을 피해 빈집이나 철로변을 찾아다녀야 하는 안타까움 비좁고 더러운 방에서 많은 식구가 기거하느라 인생 자체가 그대로 지옥을 연상시키는 비참함.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그 젊은 신혼부부가 지닌 마지막 재산, 즉 사랑의 힘도 존엄성도 가난의 사나운 파괴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급기야는.... (이순자 자서전 65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64~65쪽

   마침내 난 엄청난 결심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내 심경, 즉 아무래도 의대 공부를 포기하고 결혼을 서둘러야 할 것 같다는 말씀올 드렸던 것이다. 그날 난 가슴치는 설움에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무엇보다도 공부를 좋아하는 내가 그이와의 결혼을 위해 의사의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내 인생의 한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암담한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순자 자서전 67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66~67쪽

   신랑의 함이 오던 날의 일이다
우리 집에 모여 있던 친척들에겐 몇 가지 놀라운 일이 있었다. 먼저 함을 지고 온 친구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은 데 놀랐고, 다음에는 예단이 든 가방이 지독히도 무거워서 놀라워했다. 함에 넣을 것이 별로 없다고 고민하던 그이가 시장에서 가장 무거운 가방을 골라 가방 무게로라도 한몫해야 겠다고 나름대로의 꾀를 낸 탓이었다. 참 우습기도 한 발상이었지만, 막상 가방의 무게에 놀라 뭔가 값진 것이 많이도 든 모양이라며 친척들이 함 앞으로 모여들 때는 그이도 몹시 속이 타는 눈치였다. 다행히도 전후 사정을 집작하신 어머니가 "아이구 친구들이 많이도 와 주었으니 우선 대접부터 해야겠내” 하시며 함은 나중에 보자며 열지 않으시는 바람에 결국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이순자 자서전 69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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