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연구사료 광주사태 33주년 기념 신간 5.18 연구도서 "역사로서의 5.18"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역사로서의 5.18 제2권: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역사로서의 5.18 제4권: 5.18재판 법리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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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페터와 김영택이 목격한 목포 별동대가 광주에서 무기 분배

광주사태 유언비어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하는데 기여한 인물들 중 대표적 인물 네 명을 꼽는다면 종교계에서는 문정현 신부요, 정치계에서는 김영삼이요, 법조계에서는 채동욱이요, 역사학계에서는 한홍구이다. 구례 천안사에서 남파 공작원이 불러주는 대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김현장이 받아쓴 악성 유언비어 성명서를 전주성당 문정현 신부에게로 가져왔을 때, 문성현은 성당 고속 복사기로 몇 만장을 복사하여 천주교 조직을 통해 전국에 유포하였으며, 김영삼은 선임 대통령 노태우로부터 정치자금 지원을 받은 사실을 숨기는 수단으로써 5.18특별법을 제정하게 하고 언론의 관심이 5.18재판에 집중되게 하였다.

문정현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목적은 운동권 활동이요, 따라서 뭔가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 그의 습성이요, 광주사태의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김영삼씨도 5.18 연구가가 아니요, 5.18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데에는 그때는 지금이나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정치적 손익을 따지는 계산만이 있었을 뿐이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5.18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채동욱도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지기 전에 사법의 칼을 휘두르는 떡검이었다. 그는 검찰 내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는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의 수사에는 늘 떡검의 편견이 있었다. 떡검으로서의 그의 목적은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편견의 승리로써 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채동욱에게 김윤상과 윤석렬 등 호위무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검찰 내부에서 사조직을 키우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요, 이런 파벌 형성은 조선시대 사색당파와 성격이 비슷하다. 윤석렬이 국정원 죽이기 위한 언론 플레이를 하였을 때 채동욱 호위를 국익보다 우선 순위에 두었다는 것이 금번 채동욱 사태에 이은 윤석렬 사태의 본질이다.

채동욱이 자기 아들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바로 그것이 떡검의 직업 논리요, 떡검의 말장난이었다. 내연녀 임모 여인과의 관계를 궤변으로 부장하는 바로 그것이 말장난이었다. 떡검에게 그런 거짓말하기는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웠으나, 임여인 가정부로서 그의 아들을 키웠던 가정부에게는 그것은 가증스러운 말장난이었다. 가정부가 입을 열어도 금방 폭로되는 사실을 검찰총장이 거짓말하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었던 것일까? 떡검에게 애초부터 진실을 중요하지 않았다. 언론 플레이하면서 말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 점에 있어서 5.18 검사 채동욱도 5.18 장사아치였다. 문정현은 5.18 유언비어 장사로 운동권 신부의 자리를 굳혔다. 김영삼 대통령은 5.18특별법 장사로 정치적 실리를 챙겼다. 불순세력이 주동한 무장반란을 정당화시켜 준 채동욱의 5.18 논리도 특정세력 편들어주기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흥행성 있는 장사였다.

역사학자로 행세하는 한홍구가 말하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라 잘못된 신념이다. 그의 근현대사 논리는 광주사태 유언비어 맹신에서 출발한다. 그는 '전두환 광주학살'이란 용어를 쓰며 운동권 지지를 받았고,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전두환 광주학살'이란 용어를 사용할 유일한 근거는 5.18 재판 때 채동욱이 전두환 전 대통령 사형을 구형하여 그 판결을 받아냈다는 것뿐이다. 이 경우 그의 역사논리의 문제는 전두환이 발포 명령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발포 명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비자금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데 있다.. 정치자금 수수 때문에 사형을 언도하는 논리대로라면 정치자금을 훨씬 많이 받는 미국의 대통령들은 모두 사형감인가? 내란죄에는 사형이 없다. 그래서 1980년 여름 한민통과의 관계가 드러나자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보다는 내란혐의가 유리하기에 김대중 스스로 내란혐의를 선택했었다. 하물며 정치자금 수수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일 수 있는가? 채동욱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발포 명령자라고 공소사실을 쓸 근거를 찾지 못했는데도 사형을 구형하였다는 데에 한홍구의 고민이 있었다. 채동욱은 순전히 5.18 사기꾼들의 가정 하에 사형을 구형하였다. 그리고 그 가정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광주시민들을 학살하였다는 가정이었다. 이것이 채동욱식 논리전개의 산물이었다. 채동욱은 자기 아들 채도경도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가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어거지 논리로 5.18 재판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자금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은 그의 전두환 광주학살론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추지 못한다는 데에 한홍구의 고민이 있었다. 

대통령이 받은 정치자금이 뇌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만약 그 대통령 통치 시절 서민들이 잘 살게 되었다면 그 정치자금은 뇌물이 아니라 선정을 위한 통치자금이었다. 만약 김대중과 노무현의 좌파정권 시절처럼 서민 생활이 쪼들리게 되었다면 그 정치자금은 뇌물이었다. 5공화국 시절에 전 국민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여졌다는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자금은 뇌물이 아니라 통치자금이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채동욱의 말장난 수법으로 통치자금을 뇌물이라고 부르고 사형 언도로 유죄 판결을 내렸어도 비자금 혐의 자체는 광주학살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아무리 잘못된 신념이 한홍구에게는 신앙일지라도 잘못된 신념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다. 오늘날 왜 한국의 역사학계가 혼란에 빠졌으며 진통을 겪고 있는가? 그릇된 가정 하에 교과서를 집필하는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채동욱이 자기 아들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그의 가정사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에서 갑자기 민간인 무장단체가 등장한 원인에 대해서도 이제는 이것이 단지 전두환 한 개인이 누명을 쓰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논리를 위해 아주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될 목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학살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그런 주장의 유일한 근거는 5월 21일 50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50명 중 대부분은 아침부터 무기탈취하러 다니던 시민군이 낸 대형교통사고들로 인한 타박상 희생자들이었다. 금남로 일대 총기 희생자들은 시민군 총탄에 맞은 희생자들이었으며, 그 총탄은 공수부대 쪽이 아니라 시민군 쪽에서 날아든 총탄이었다. 공수부대 집단 발포 유언비어의 진실은 시민군 발포였다. 

전두환이 광주시민 50명을 죽이니깐 광주시민들이 무장하였다는 주장은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는 요란한 주장이지만 아무도 전두환을 본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의 목격자도 없이 어떻게 전두환을 살인미라고 부를 수 있는가? 사실 이 주장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 그 날 오전에 시위군중 중에 이미 무장괴한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진실일진대 오후 한 시 반 이후에 광주시민들이 무기 탈취하러 출발하였다는 주장은 이제 무너져 내려야 한다. 21일 오후 한시 반에 시민군 장갑차를 타고 도청 쪽으로 돌진하던 조사천씨가 등 뒤 시민군이 쏘는 카빈소총 총탄이 흉부에 박혀 사망하였는데, 5.18측 주장에서는 조사천씨가 공수부대 총에 맞은 것으로 단정하고 이때부터 전라도 여러 지역으로 무기 탈취하러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조사천 씨가 오후 한 시 반에 시민군 카빈소총에 맞기 전에 시위대 중에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자들이 있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된다. 그런데 아래 동영상에서 보듯 1989년 1월 26일의 광주청문회에서 김영택 기자는 21일 오전에 이미 카빈소총을 소지한 자들이 시위군중 전열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위의 1989년 1월 26일자 MBC 뉴스 동영상에서 김석진 기자는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을 이렇게 요약 보도한다: "시위대 쪽에서 다른 종류의 총소리가 난 점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후 한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광주시민으로서 시민군을 위하여 증언하는 김영택 기자가 "오후 한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는 것은 5.18측으로서는 몹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전 중에 이미 카빈 총을 든 무장괴한들이 시위군중 속에 있었으며, 그 날의 카빈소총 희생자들은 그들의 총에 맞았다. 그러면 그 총들은 언제 어디서 구한 총들이었는가가 김영택 기자가 오랫동안 품은 수수께끼였다. 광주청문회 때는 그 전 날 밤의 광주세무서 방화사건 때 지하에서 총기 피탈 사건이 있었다는 기록을 나중에 보았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이미 5월 20일에 무장시위대가 출현한 사실을 보여준다. 

<푸른 눈의 목격자>의 아래 토막 동영상에서 1분 53초까지는 5월 20일 오후 광주 어귀에서 조우한 무장단체와 힌츠페터 일행이 함께 광주로 진입하는 장면이고, 1분 54초부터 갑자기 바뀐 장면은 그 다음날인 21일 오전 9시부터 시위대가 군납품업체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각종 군용차량을 탈취한 후 어느새 무기를 탈취한 시민군으로 변하여 도청을 향해 달리는 장면이다. 

채동욱이 자기 아들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듣는 이의 착각을 일으키려는 전술이었다. 이제까지의 5.18 담론이 그런 착각 일으키기 전술로 점철되어 있었다. 언론이 5.18 재판 판결에 대하여 객관적인 보도를 한 적이 있는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자금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음에도 국민들은 그가 발포 명령 혹은 광주 학살 혐의로 그런 판결을 받았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 경우 언론은 5.18 재판부의 착각 일으키기 전술에 협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KBS가 2003년에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5.18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을 때도 그 프로그램 제작 의도는 힌츠페터가 '전두환 광주 학살' 현장 목격자였다는 착각을 시청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가로등 옆의 무장 복면괴한

그런데 힌츠페터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커녕 공수부대원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가 본 무장세력은 민간인 무장세력뿐이었다. 그러면 그가 광주로 들어가는 샛길에서 만난 무장단체는 누구였는가? 유언비어가 광주사태에 대한 그의 지식의 전부였던 힌츠페터는 이 무장단체에 대하여 처음부터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광주의 대학생들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광주의 대학생들은커녕 광주시민들도 아니라, 목포에서 동원된 깡패조직이었다. 첨언하면, 지프차 맨앞 범퍼 위에 전두환을 언급한 현수막이 걸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21일 오후의 총격전 이후에 전두환을 언급한 현수막들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20일에 목포의 김대중 계열 별동대가 동원되었을 때 그런 현수막을 사전 준비해 두고 있었다.

힌츠페터의 눈은 푸른 눈이었다. 그러나 5.18의 진실을 바로 인식하는 자의 푸른 눈이 아니라, 유언비어에 세뇌당하고도 자신이 세뇌당한 것을 모르는 자의 푸른 눈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행한 촬영기사 헤닝이 촬영한 영상물은 있는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영상기록이다. 이미 5월 20일에 군용지프와 군용트럭을 몰고 다니는 무장단체가 광주로 진입하는 장면을 KBS의 영상물 <푸른 눈의 목격자>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상물 화면을 정지시키고 세밀히 관찰하면 5.18의 진실을 풀어주는 열쇠, 즉 무장괴한들이 최초로 등장한 시점에 대한 단서가 보인다. 첫째로,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5월 20일 오후에 지프차와 군용트럭 등 군용차량을 타고 광주로 진입하는 외지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래의 두 캡쳐물을 보면 힌츠페터 일행이 탄 트럭을 바짝 따라오는 목포 조폭들의 지프차에서 두 자루의 총이 보인다. 지프치 오른쪽(사진에서는 좌측)에서 옆으로 삐져나온 총 한 자루가 지프차가 광주에 진입하는 순간 그 총구를 60도 방향 하늘을 향하여 올리고 있다. 운전사 뒷좌석의 조폭도 운전사 머리 위로 앞을 향하여, 그러나 앞 트럭에 탄 힌츠페터를 겨누지 않도록 비스듬하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 힌츠페터의 영상물에 그대로 포착되었다.

5월 20일 광주로 침투한 외지인 무장단체
옆으로 삐져나온 총신 총구가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KBS가 이 영상물을 편집할 때는 5.18사기꾼들에게 불리한 장면들을 빼 버렸다. 위 동영상 23초부터 지프차에서 두 자루의 총이 보인다. 지프차의 총은 화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보지 못하지만 뒤에 따라오는 군용트럭 적재함 위의 여러 자루의 총은 역력히 눈에 띄는데, KBS가 9초간의 이 몹시 중요한 장면을 방영하지 않았다. KBS가 삭제한 9초간의 그 중요 장면이 아래 유튜브 동영상에서 흑백 화면 처리된 장면이다.

위 동영상에서 5월 20일에는 전혀 복면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때였음에도 흰 수건으로 복면을 한 네 명 (혹은 그 이상)의 안내조가 다리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안내하는 장면이 영상물에서 보인다. 위 사진에서 그 중 두 명이 보이는데, 그 두 명 중 가로등 옆 복면괴한은 카빈소총을 들고 있다. 5월 20일 오후 외지인 조폭조직이 군용차량을 타고 광주로 진입하고 있었을 때 무장조직이 다리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의 행선지를 안내하였다는 사실은 5월 20일 시민군 군사작전이 비밀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 다음 날인 21일 오후의 사건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사건이었다.

광주로 침투하는 외지인 무장단체

다리 위 가로등 옆 복면괴한이 왼 손으로 카빈소총을 옆으로 눕혀서 든 채로 오른손으로는 손짓을 하면서 군용트럭 위의 무장괴한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에 트럭 위의 무장괴한들이 총을 위로 높이 치켜세우며 환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5.18측에서 이 영상물을 편집하였을 때는 그 소리를 없앴으므로 뭐라고 외치며 환호하였는지 알 수 없다.

목포 별동대

위 사진에서 무장괴한들이 공중 발사 자세로 치켜둔 총 두 자루가 선명하게 보인다. 적재함 앞쪽의 세명은 운전석 지붕(호로) 위에 거치대(양각대와 삼각대)를 활용한 기관총(LMG 기관총 또는 소총) 같은 것을 몸 앞 쪽 정면으로 향하게 여차하면 사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줄무늬 옷을 입고 가발을 쓴 듯한 조폭이 차량 뒤를 향해 앉아서 45도 각도로 경계-총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5월 20일 무장단체 출현

위 사진에서 두 개의 총구 방향이 대각선 방향으로 약간 움직인 것이 보인다.

군용트럭 호로 위에 거치된 무기

위 사진에서 좀 더 가까이서 총들이 보인다. 아래의 이어지는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그 다음날인 21일 정오를 바라보는 오전 이미 광주 금남로 4거리 등에서 이미 총기 및 실탄 분배가 시작되었으며, 이때 무기 분배를 한 자들이 바로 전 날 오후 군용차량을 타고 광주에 입성한 목포 별동대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청 인근 주민들이 도청 공무원들을 내쫓고 그들의 출근을 방해할 목적으로 총 들고 무장하였던 것인가? 아니다. 21일 오전부터 민간인 무장괴한들이 출현하자 그들은 겁이 나서 문을 꽁꽁 닫고 숨거나 피난 갔다. 그 날 아침 도청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무장괴한들은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목포 별동대였다. http://www.docstoc.com/docs/39206482/kwangju-secret-of-kwangju-doc 에 보존되어 있으며, 목포 김대중 계열 별동대 5월 20일 광주 침투를 클릭하면 5월 20일 김대중 계열 별동대 조직 100여명이 광주로 올라온 사실을 기록한 문건이 있다.

어째서 주로 조폭으로 구성된 외지인 무장단체가 광주로 동원되었는가? 아마도 이석기의 내란음모와 견주어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이석기의 RO(Revolution Organization: 혁명단)의 뜻을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석기의 민족민주혁명당에서 따온 말이며, '민족민주'는 5.18 표어 '민족민주'에서 따온 말이다. 광주를 중심으로 '민족민주혁명'을 조직하던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는 북한식 사회민주주의 혹은 인민민주주의라는 뜻으로 '민족민주'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북한의 대남공작용어에서 '민족민주'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민족민주혁명 방법이 무장반란이었고, 이석기의 민족민주혁명의 방법 역시 무장반란이다.

그들을 배후 조종하던 불순세력과 학생 운동권 사이에는 사상 무장의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박현채가 '민족민주'라는 용어를 퍼뜨리기 시작한 때였으며, '민족민주'가 본래 위장명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용어혼동전술을 위해 채택된 용어였으므로 전남대 운동권 학생들이 '민족민주화'라는 표어를 걸고 시위를 조직하면서도 그것이 '북한식 사회민주화'라는 의미임을 잘 알지 못했다. 전남대 학생운동권 중에서 '민족민주혁명'을 위해 무장반란에 협조할 사람은 이재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궈과 대조적으로 목포의 김대중 계열 깡패 조직은 "김대중 선생 만세"를 외칠 줄 알 뿐 '민족민주'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도 없고, 아무런 사상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장반란 행동대장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자들은 역시 조폭 조직이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처음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 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대로 목포사태가 있었음에도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에 가려 전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김영택 기자가 5월 21일 오전에 도청광장에서 본 무장세력은 힌츠페터의 5월 20일자 영상물에서 보이는 목포 별동대이며, 이들은 "김대중 선생 만세" 구호와 더불어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주동하였을 만큼 김대중 추종세력이었다. 힌츠페터의 21일자 영상물이 보여주듯 21일 정오경 금남로 4가 등에서 무기 분배를 한 자들은 전남도청 인근 주민들이 아니라, 목포 별동대였다. 5월 21일 광주 일원의 무장봉기는 사전에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민중봉기에 의한 김대중의 집권전략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목포 운동권 조직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 외지에서 군용차량을 타고 광주로 침투한 무장단체를 헌법기관으로 간주한 5.18 재판 법리의 모순, 광주청문회의 핵심 증언, 이석기의 민족민주혁명당 등 에 대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에서, 그리고 5.18 표어 '민족민주화'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석기의 RO의 민족민주혁명론의 역사적 뿌리에 대해서는 < 역사로서의 5.18 제4권: 5.18재판 법리의 모순 등에서 자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글 작성일: 2013년 10월 24일

이 글을 옮겨가실 때 사용하실 출처 링크는 http://www.study21.org/518/video/5-21.htm 입니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에 나타난 시민군 최초무장시점

이석기 및 채동욱 사태에 즈음하여 재조명하는 1980년 5월 19일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 관련자 호위무사 채동욱

5.18 주동자 박형선과 문재인의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5.18 인민군 검사 채동욱과의 역사논리 전쟁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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