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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역사로서의 5.18 제4권: 5.18재판 법리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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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및 채동욱 사태에 즈음하여 재조명하는 1980년 5월 19일
 

5월 19일 신현확 내각 총사퇴를 보도한 기사

  광주사태 전개과정에서 5월 19일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오늘날 5.18로 명칭이 굳어진 사건은 원래 19일에 일어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사건이었다.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이 5월 16일 최규하 대통령 정부에 보낸 최후통첩에서 신현확 총리 내각 총사퇴 일자를 못박은 날도 일요일인 5월 18일 아니라 월요일인 5월 19일이었다. 가톨릭농민회가 먼저 광주 북동성당에 집결한 후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하기로 예정한 날도 성당에서 미사가 있는 5월 18일이 아니라 월요일인 5월 19일이었다. 사퇴하지 않으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킨다는 김대중의 외곽단체들 및 사조직의 협박에 굴복하여 신현확 내각이 일괄 사료를 제출한 날 역시 5월 19일이었다.

   오늘날 이석기의 내란음모를 수사 당국이 사전 발견하였을 때 박근혜 정부는 어떻게 하는가? 주동자들을 연행함으로써 예방 조치를 취한다. 1980년 5월 중순 김대중의 내란음모가 드러났을 때 최규하 대통령 정부도 5월 18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중봉기 음모 주동자들을 예비 검거함으로써 예방 조치를 취하려 했었다.

   '민학련' 및 '민투' 등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 산하단체들과 <가톨릭농민회> 등이 무장반란을 일으키기로 예정된 날짜가 5월 19일이었고, 최규하 정부는 5월 18일 0시에 비로서 예방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그 예방조치로 무장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예방할 수 있었는가? 아니다. 아니다. 예방하지 못하였다. 그때 정부가 무장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장반란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사당국이 김대중의 사조직들과 외곽단체들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조직하고 있었음은 간파하였지만, 그 민중봉기의 속 내용을 과격한 가두시위 정도로만 예상하고 있었고, '남민전'과 '전남민청협' 등 지하조직들 및 종교보호막을 쓴 가톨릭농민회 운동권이 무장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시킨 사실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5월 18일 0시에 가두시위 주동자들 몇 명이 예비검거되었다. 그러나 윤한봉과 장기표 등 진짜 주동자들은 예비검거하지 못하였다. 민중봉기로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어마어마한 음모를 꾸미고 있던 자들은 도망갈 준비를 미리 해놓고 있었고, 따라서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짜 행동대장들은 검속을 피하였다. 내란음모의 진짜 행동대장들이 검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윤상원 등 무장반란 주동자들은 예비검속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금년 2013년의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의 경우 이른바 '채동욱 혼외자녀 의혹'이라는 변수가 있다. 이석기가 무장반란 음모를 꾸미고 있었을 때 종북세력이 국정원을 무력화시키려 하였다. 그 행동대장이 채동욱 검찰총장이었으므로 만약 '채동욱 사태'라는 돌발적 변수가 없었더라면 국정원을 무력화시키려는 채동욱과 국정원간의 힘겨루기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이 민중봉기로 최규하 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집권 전략으로 삼았을 때 그 시절의 국정원을 먼저 잗악하여야 했다.그런데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이 이미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중앙정보부의 쌍둥이 자매였던 보안사령부만 무력화시키면 되었고, 그래서 전두환 죽이기를 꾀하였던 것이다. 김대중이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전략 수순으로서 먼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거세하려 하였던 이유는 그가 정몽주와도 같은 최규하 대통령 충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이 몸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수호하는 한 김대중의 민중봉기에 의한 집권 전략은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가 전두환을 죽이려 하였으며, 일단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배를 탄 이상 전두환을 죽이는 것이 그가 죽고 사는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어언 3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두환을 죽이는 것이 김대중 세력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이다.

광주사태 당시에는 '채동욱 사태'같은 변수가 없었다. 인터넷 미디어가 채동욱 사태를 몰고 왔다. 채동욱이 어째서 자기 아들 채도경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증폭시킨 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채동욱 사태의 추이가 궁금하여 신문을 본다. 그러나 광주사태 직전에는 그렇게 국민이 시사에 흥미를 느낄 만한 소재가 없었다. 전두환 죽이기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주동자들에게는 몹시도 중요한 문제였으나, 여전히 대다수의 국민들은 보안사령관이라는 보직이 군에 있는지도 보안사령관이 이름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1980년 5월 18일 0시에 김대중이 자기 심복 이종찬이 총무국장으로 있는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고 해서 5월 19일로 예정된 무장반란 음모가 중단될 수 있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 세력의 내란음모와 남민전 세력의 무장반란 음모는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역사학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 세력의 내란음모와 남민전 세력의 무장반란 음모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으되 별개의 음모였으며 김대중과 남민전을 연결해 주는 다리가 <민청협>이었다. 전국적 민중봉기로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고 김대중이 집권하게 한다는 내란음모의 구체적인 계획은 <민청협>이 마련한 계획이었다. 여기에 자생 간첩단인 남민전 세력이 끼어들어 그 틈을 타 무장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쉽게 설명하면,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숙주요, 남민전 혹은 과격한 종북 세력의 무장반란 음모는 공생 관계의 기생충이었다. 무장반란에 분명 김대중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가 무장반란을 총지휘하였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느 자신의 내란음모를 이용하여 무장반란을 일으키려 하던 제3의 세력이 있었음을 몰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채동욱이 5.18떡검이었다는 사실은 채동욱처럼 역사에 무지한 자가 역사 논리를 재단할 때 한국근현대사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을 기만하며 자기 아들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자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려낼 자격이 있는가? 채동욱 떡검이 전두환 피고 사형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비자금 누명을 씌웠을 때, 무장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군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들이 헌법기관이라는 이상한 법리에 편승하였을 때 여기에 그 어떤 객관적 증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두환은 채동욱의 주관적 주장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주관적 주장으로 객관적 진실을 지배하던 채동욱이 이번에는 객관적 진실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이른바 채동욱 사태이다. 5.18법정의 장본인이요, 5.18사기꾼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되는 채동욱이 또 하나의 역사의 법정에 서게 된 것이 바로 현 채동욱 사태이다. 계성초등학교 학적부에 자기 아들로 기록된 소년이 자기 아들인지 아닌지를 유전자 검사라는 과학적 수단에 의해 가려내는 것이 이번 소송 사건의 관건이며, 채동욱 스스로 이 소송을 제기하였다. 5.18재판 때는 주관적 허위주장의 큰 목소리가 이겼다. 지금은 무엇이 개관적 진실인지를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어째서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건립한 광주사태 사적비들이 나주에 있는가? 그 이유는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의 사조직 국민연합 나주지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의 이 사조직에 가입한 자들에게는 거사 성공의 벼락 출세의 기회였다. 그들이 5월 19일에 시작하기로 예정된 거사를 계획하였을 때는 광주사태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전라도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켜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때는 전혀 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도 개념도 목표도 의식도 인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김대중에게 줄을 서서 음모를 꾸미던 자들에게 그것은 벼락 출세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왜 광주사태에 그토록 많은 나주 시민군이 있었는가? 어째서 나주에 5.18유공자 대우를 받는 족속의 수가 그리도 많은가?

아래 사진에서처럼 군용트럭을 타고 다니던 민간인 무장단체를 광주시민군이라고 호칭하였다. 2003년 KBS가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제목으로 편집하여 방영한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5월 20일 이미 군용트럭을 타고 다니는 무장폭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면 군용차량을 타고 다니는 광주시민군이 최초로 등장한 날은 언제인가?

트럭탄 5.18무장세력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역시 나주시민군이 가장 잘 안다. 나주시민군으로 구성된 나주의 5.18단체가 설치한 아래의 5.18 사적지 표지석에 광주시민군 시위차량이 나주에 최초에 출현한 시점이 5월 19일 오후 3시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5월 19일부터 시민군 활동을 한 나주시민군 단체의 공식 기록이다. 5월 19일에 이미 광주시민군 차량이 등장하였다.

나주에서 누가 유언비어 나팔수였는가? 김대중의 사조직 국민연합 나주지부에 가입한 자들이었다. 나주가 공백 상태였는데 5월 19일 갑자기 나주시민들이 광주시민군에 호응한 것이 아니었다. 나주에는 이미 김대중의 내란음모 선봉에 선 조직이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민중봉기 선동이었으므로 조직적으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던 것이다.

5.18사기꾼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두가지는 하나는 민주화운동을 하기 위해 총 들었다는 거짓말이요, 다른 하나는 가족이 죽었기 때문에 광주시민들이 총 들었다는 거짓말이다. 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도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에 폭도들이 민주화운동을 하였다는 주장은 아직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 학생들이 인터넷을 하였다는 주장처럼 황당한 것이다. 나주시민군은 김대중의 사조직에 가입된 장년들과 청소년 및 고교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누구도 광주에서 가족이 죽은 사람이 없었다. 국민연합 나주지부 사람들은 거사에 성공하면 감투를 쓴다는 욕심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고, 고교생들은 선동되어서 움직였을 뿐이었다. 위 사적비에 따르면 5월 19일 오후 3시경 광주 송정역 부근에서 계엄군에 구타당한 학생들이 있었다는 미확인 유언비어가 있었다. 그 유언비어를 전하기 위해 광주시민군이 조직적으로 차량을 타고 나주에 왔다. 과연 광주시민군을 자처하는 괴무장단체가 퍼뜨리는 유언비어가 나주시민들이 총을 들었어야 할 이유였는가? 미확인 소문을 듣고 격분하였으니 버스를 강탈하여 전남 서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전남도민에게 국군과 전투를 벌이라고 선동하자는 것이었는가?

아래 사진을 보면 군용트럭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장봉기를 선동하는 광주시민군 시위차량 행령이 보인다. 도대체 민간인들이 군 장갑차를 몰고 다니며 시위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또 있는가? 더욱 가관인 것은 5.18떡검 채동욱이 이런 괴무장단체를 대한민국 헌법기관으로 간주하였다는 사실이다. 왜 작금 이석기가 북한과 연계하여 무장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사태가 벌어졌는가? 5.18재판 때 떡검 채동욱이 괴무장단체가 헌법기관이라는 괴상한 법리로 무장반란을 정당화시켜 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광주시민군 장갑차와 트럭

지금도 만약 좌익 혹은 종북 검사들이 이석기와 그의 RO는 헌법기관이라고 규정하는 법리를 만들어 놓고 그 법리에 따라 재판하면 이석기를 고소한 국정원이 헌정질서문란 혐의를 쓰게 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 5.18재판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지금 5.18 유공자 대우를 받으며 각종 혜택을 누리는 자들 대부분이 광주사태 당시 청소년들이었다. 청소년들에게는 아직 참정권조차 없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헌법기관이었다는 말인가? 5.18떡검 채동욱은 처음부터 법을 잘못 알고 있었다. 광주시민군이 전남 서남부 여러 지역을 다니며 시민군 모병을 하였을 때 응한 자들은 아직 분별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이었다. 채동욱의 5.18 법리에서처럼 그들이 헌법기관 직무를 수행하고자 시민군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공짜로 트럭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맛에, 그리고 폭도 천하가 된 곳에서 소영웅적 군중심리에 휩쓸려 시민군이 되었다. 여기 이 시민군 트럭 위에 우글거리는 중고생들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커녕 민주라는 말뜻조차 모르는 아이들, 그저 불순세력이 탈취한 군용트럭 공짜로 타는 재미에 불순세력에 이용당하는 아이들이었다. 5.18떡검들의 주관적 주장으로 만들어진 5.18 법리에서 그들이 헌법기관으로 간주되지만 객관적 사실에서 그들은 헌법기관이 아니었다.

청소년 5.18 시민군

5.18떡검 채동욱은 독심법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뇌물 수수 누명을 씌우고 사형을 구형하였다. 그가 독심법으로 기업인들 마음 속을 읽어보니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인들은 대가를 바라고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채동욱의 독심법이 공평하게 적용되려면 미국 등 전세계 민주국가들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뇌물 수수죄로 구속되어 사형 판결을 받아야 한다. 위 시민군 군용트럭 위에 가득 올라타 있는 시골 청소년들에 대해서도 채동욱은 타임머신을 타고 광주사태 당시로 돌아가 그들 마음 속을 읽어보니 헌법기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시민군이 된 것이라는 독심법을 적용하였다. 그러면 지금 채동욱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을 때의 그의 법리는 무엇인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법관이 주관적 판단만으로 채도경이 자기 아들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가 유전자 감식에 응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주관적 판단의 오류로 그의 명성이 파괴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광주사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우리의 소중한 한국 근현대사가 몇몇 5.18떡검들의 주관적 판단의 오류에 의해 파괴되어서야 되는가? 채동욱이 조선일보에 정정보도를 요구하였듯이 우리도 그의 잘못된 5.18 법리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무엇이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채동욱의 문제인가? 승승장구하며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이 무엇에 좌초하는가? 이것이 단지 그의 사생활의 문제인가? 아니다. 지금 이것은 그의 거짓말에 대한 정직성의 문제이다. 자기 아들이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말할 때에 그의 도덕성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 문제는 그가 조선일보에 소송을 걸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만약 재판장이 채동욱의 아들은 친자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려주면 그가 재판에 이기겠지만 그런 판결로 아이와 아이 어머니 마음을 멍들게 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들이 아들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재판장이 내려야 한다면 그 법정은 몇몇 개인에게는 잔인한 법정이다.

지금 일파 만파로 확산되고 있는 채동욱 스캔들은 이미 법리 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혼동 때문에 치열한 법리 논쟁이 불붙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법리가 채동욱식 흑백 논리일 때는 어떻게 되는가? 5.18 재판 때도 채동욱식 흑백 논리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혼동을 가져왔다. 법리가 흑백논리에 빠질 때 어떤 함정이 있는가? 원래 역사 논리는 법정 판결 대상이 아님에도 채동욱이 제멋대로 법정에서 역사를 판단하였다. 작금 혼외아들도 아들은 아들인데 이것이 법정 싸움거리일 때 흑백논리의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여기 어느날 갑자기 무장폭도들이 점령한 도시 시가지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광주해방구

그리고 여기 철모 쓰고 군용트럭 몰고 다니는 민간인 무장단체 사진들이 있다. 이렇게 정체 불명의 무장폭도들이 한 도시를 점령하였을 때 바로 그것이 치안 마비와 치안 공백의 상태이다. 이런 난리가 났을 때 국가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16년 후에 채동욱 검사가 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교도소를 습격한 무장폭도들은 헌법기관이라는 법리를 내놓을지를 어떻게 국가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는가? 지금이라도 어느 도시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무장폭도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철모 쓴 시민군과 시민군 트럭

채동욱 및 그에게 동조한 5.18떡검들의 법리에서 무장폭도들은 헌법기관이지만 복면 쓰고 총 메고 거리를 활보하는 무장폭도가 무장강도처럼 보여 시민들은 무서워했었다.

광주시민군

무장폭도들이 헌법기관으로 간주된 5.18재판 법리에서는 폭도들이 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교도소를 습격한 행위는 최고의 선이요, 무장폭도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하려던 당국의 노력은 최악의 범죄, 즉 헌정질서문란이다. 총 들고 거리에서 약탈 혹은 위압적 행동을 하는 무장폭도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하여야 광주시민들도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고, 북한이 남침할 빌미도 없앨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정부의 노력이 무조건 나쁜 것으로 판결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흑백 논리의 함정이다. 그런 흑백 논리의 씨를 뿌렸던 채동욱이 이번에 스스로 그런 흑백논리의 함정에 걸려 들었다.  

채동욱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본처 딸에게도 내연녀가 낳아준 아들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잣대에 의해 그의 그런 모든 노력이 부정된다.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죽이는 검사로서 출세의 가도를 달려왔던 채동욱이 자신의 사생활과 자기 가족의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명명백백하게 변호할 능력이 없어 막장 재판으로 치닫는가? 사람은 심은 대로 가두는 것이며 그는 5.18악법을 심고 막장 재판을 거두었다. 도대체 채도경군의 삶과 미래도 중요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꼬여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처음부터 '파도남'의 평판은 흑백논리의 평판이었다. 따라서 '파도남'의 절대성이 무너지면 그의 명성의 급소를 가하는 일격을 맞게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파도남'이라고 부르며 한참 비행기를 태워주다가 갑자기 추락시켰다.

5.18재판은 처음부터 그 씨가 잘못 뿌려진 재판이기에 끝난 재판이 아니다. 누가 5.18재판의 승자인가? 자신의 영원한 앙숙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만들어주는 꼴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승자인가? 객관적 진실을 짓밟는 특유의 주관적 논리로 사법의 칼을 휘둘러 오다가 자신이 잔인한 법정에 서게 된 채동욱이 5.18재판의 승자인가?

재판만능주의는 착각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 대상은 처음부터 몇몇 떡검들이 법정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의학적 지식이 없는 법관이 의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유전자 감식 능력이 없는 법관이 법 조문만 읽으면서 채도경이 채동욱이 아들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경우 법관의 일은 의학전문가들의 감식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5.18 사건에 관해서도 역사에 무지한 법관들의 일은 역사 연구가들의 연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은 역사 연구가 아님에도 채동욱이 역사의 심판자 노릇을 하겠다며 사법의 칼을 마구 휘둘렀을 때 그는 이미 검사로서 탈선했던 것이다. 5.18은 그 객관적 진실 규명을 위해서 이제라도 역사 연구가들의 손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최근 채동욱의 행적에 대하여 점점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그의 편파 수사였다. 그는 그가 비호하려는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수사는 흐지브지 종결하였다. 정몽헌씨의 대북비밀송금 수사 때 몸통은 김대중의 최측근 박지원과 권노갑이었으나 이들에 수사는 흐지부지하였다. 스폰서 검사 사건 때도 수사를 흐지부지 덮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발자 친인척을 괴롭혔다. 검찰총장이 되어서도 광주일고 동문들의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사건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 민주당 국회의원 김경재씨에 따르면 정몽헌씨에게는 모멸감을 느끼게 하여 자살에 이르게 하였다. 2005년에도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가족과 지인 앞에서 모멸감을 느끼게 하여 안 전 시장이 자살을 선택하였다. 5.18떡검 시절 때도 그는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수사를 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가 처벌하고 싶은 인물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공작을 하였다. 만일 그 목적이 특정 인물들에게 누명을 씌워 처벌하는 것이라면 재판만능주의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목적이 그런 정치재판 혹은 인민재판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 규명이라면 떡검들의 편파 수사에 의한 재판만능주의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시민군에 대하여 한마디 부연하면 시민군 모두가 깡패 혹은 무장강도 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나주공고앞에 세워진 5.18사적비 비문에서 나주 5.18단체 스스로 그들 대부분이 광주사태 당시 당시 한독공고(현 나주공고)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나주공고앞 5.18사적비    

그러면 나주 한독공고 학생들이 헌법기관이었는가? 아직 투표권도 없는 미성년자들이 어떻게 헌법기관일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위 비문은 영암, 함평 등지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주로 시민군 차량이 올라온 때가 1980년 5월 21일 정오 경이라고 기록한다.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최초의 총성이 울린 때는 오후 한 시경이었다. 5.18사기꾼들의 주장처럼 첫 총성이 울린 후에 시위대의 무기 탈취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첫 총성이 울리기 여러 시간 전인 오전부터 전남 각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무기고 무기 탈취가 시작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윤한봉의 <전남민청협> 등이 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반란을 일으키려던 사전 계획이 있었고, <가톨릭농민회> 등의 용공단체들은 5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였었는데, 김대중의 <국민연합>과 <민청협>은 5월 20일과 22일을 총궐기 대회로 정해 놓고 있었다. 위에서 세 번째의 나주터미널 5.18사적비는 이미 5월 19일에 시민군 차량이 출현한 사실을 기록하고, 위의 나주공고앞 5.18사적비는 영암과 함평 등에서의 무기 탈취는 5월 21일 정오 이전에 시작된 사실을 분명하게 명시한다. 5월 19일부터 시민군이 등장하여 5월 21일 정오 무렵에 전남 서남부 13개 시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엄청난 무장세력이 형성된 것은 5.18떡검들의 주장대로 시민군이 헌법기관이었기 때문도 아니요, 5.18사기꾼들의 주장처럼 5월 21일 오후 한 시 이후에 시민군 가족이 죽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광주사태라고 불리어지는 5.18 사건 당시 무장반란은 사전 준비되어 있었다. 


글 작성일: 2013년 9월 27일

이 글을 옮겨가실 때 사용하실 출처 링크는 http://www.study21.org/518/photo/5-19.ht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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